-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5/12/18 23:55:52
Name   트린
Subject   또 다른 2025년 (11)

11.

쉽게 해결될 거라 생각한 두 경찰관 생각과는 달리, 데이터는 연착되었고 그마저도 완전하지 않았다.
우선 세 사람의 옷차림을 확실히 확인할 수 있는 자이 아파트 내부 CCTV 데이터가 오지 않았다.
112 관제센터 당직 오퍼레이터가 말했다.

"조작에 능숙하지 않아 시간이 걸린답니다."
"네?"
"열심히 해 보는데 저희에게 어떻게 데이터를 송출하는지 모른대요."
"그게 말이 되나요. 그분들 사오십대 후반에 다 시설 관련 교육받으셨을 텐데."
"보통 오전조가 데이터 백업, 이송, 관리를 맡아서 연습을 몇 번 안 하셨대요. 최대한 빨리 보낸대요."
"...알겠습니다. 그럼 스마트시티 CCTV 데이터는요?"
"잠시만요. 그건 계엄사 산하 담당 부서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아하, 공무원들.
공무원 업무 분장은 공무원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밝은 젊은 남자 목소리가 경찰차에 울려퍼졌다.

"안녕하십니까, 정보사 사이버 안보팀 소속 한영교 중위입니다. 자이 아파트 사건 초동 담당 경찰관들 되십니까."
"구로경찰서 김지완 경장입니다."
"동서 장주환 경사입니다."
"반갑습니다."

두 경찰관의 자기 소개를 들은 한영교 중위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거부감이 드실 수도 있겠지만 미리 고지부터 들으셔야 합니다. 제가 주욱 읽을 테니까 그냥 들으세요.
계엄법 제9조 및 군사기밀보호법에 의거, 현재 계엄군과 경찰이 합동 운용 중인 지능형 치안식별 시스템 별칭 스마트시티 CCTV는 국가 안위와 직결된 1급 군사기밀로 격상되었습니다. 따라서 해당 사실을 취득, 인지, 고지받은 경찰 공무원은 직무 수행 중 취득한 다음의 사실을 언론, 민간인, 가족을 포함한 제3자에게 일절 누설할 수 없습니다.
하나, 지자체 방범 CCTV가 군 정보망과 실시간 연동된다는 사실.
둘, CCTV에 AI 안면 인식, 보행 분석 등 생체 추적 기술이 적용된다는 사실.
셋, 특정 인물(요주의 대상)에 대한 자동 알림 및 추적 알고리즘의 존재.
넷, 관제센터 내 군 연락 인원의 신원 및 규모. 넷의 하부 하나. 데이터 연동 센터의 존재 및 일체의 운용 사실."

두 경찰관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둘 다 정도는 다르지만 기가 찬 표정이었다.

"듣고 계시죠? 처벌 규정입니다. 상기 사항을 위반하여 기밀을 유출하거나 유언비어를 유포할 시, 이적 행위로 간주하여 민간 법원이 아닌 군사법원에 회부합니다. 적용 법조는 군형법 제13조(간첩), 제80조(군사기밀 누설), 계엄 포고령 제1호 위반이고, 양형 기준은 최고 사형, 무기 또는 7년 이상의 중형에 처하며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즉시 파면 및 구속 수사를 원칙으로 합니다.
...초면에 죄송합니다. 규정이 그래서요. 고지를 확인했으며 이에 동의한다고 대답해 주십쇼."

공무원 신분도 굴레인데 사형까지 거론되니 두 사람은 팔팔 끓인 물이 자그마한 눈송이에 쏟아진 것처럼 저항 없이 순순히 대답할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경찰차의 노트북에 정보사 마크와 로딩 바가 잠시 뜨더니 네비게이션이랑 비슷한 화면으로 교체되었다. 시스템이 같아서 그런지 경찰관들이 가끔 보는 112 관제센터의 화면과 똑같았다.
하지만 다른 게 하나 있었다. 서칭 타깃이라는 칸이 따로 있었고 이 칸 안에는 긴 머리에 군복을 입은 젊은 여성이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이 들어 있었다. 사진에는 안수진 중위라고 적혀 있었다.

"00시 40분 현재 현장 주변 반경 5킬로미터 내 요주의 대상 안수진 중위 이동 예측 데이터 보여드립니다."

화면엔 대체로 200미터마다 하나씩 검은 점이 찍혀 있었다. 검은 점 주변은 레이더 돌듯 껌뻑거리면서 주기적으로 파문 같은 원을 퍼뜨렸다. 검은 점은 바로 카메라였다. 카메라를 중심으로 파문 같은 원이 퍼질 때마다 사람 모양들의 움직임이 갱신되었다. 새벽이라 통행인이 얼마 없어서인지 사람 모양은 두서넛에 불과했다.
김지완 경장이 화면을 엄지 검지로 늘려보니 사람마다 확률이 붙어 있었다. 대부분 0퍼센트부터 10퍼센트까지 소소했고 딱 하나 53에서 70퍼센트까지 널뛰는 인간이 있었다. 세부사항을 눌러보니 이동 경로 기록이 자이 아파트에서 시작해 현재 구로역 방면으로 걷는 중으로 나왔다.
김지완 경장은 대상을 실시간 지정 화면으로 바라보았다. 살짝 끊기는 화면 속 작은 체구의 사람은 두툼한 롱코트 차림에 머리에는 모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여자가 거의 분명한 이 사람은 특이하게도 왼쪽 다리를 심하게 절었다.  
장주환 경사가 신호를 받고 잠시 멈춘 상태에서 화면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전혀 안 보이고. 2인이 아니라 1인인데 그거야 주의를 덜 끌려고 헤어졌을 수 있는 거고."
"그쵸."

지완이 중위에게 물었다.

"다리는 다쳐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보행 패턴 교란 전술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안수진 중위는 정보사 소속으로 저랑 같은 실에서 근무했죠. AI는 인간의 걸음을 기억해 그 사람을 판별하는데 다리를 절면 보행 패턴이 깨지면서 그 사람이 가진 고유의 흔적이 사라져요. 그럼 여기에 대비해 AI는 미세 패턴 분석으로 어깨나 골반 등의 움직임으로 게이트 안티 스푸핑, 즉 인간의 속임수를 걸러내죠.
그렇게까지 하는 엔진이 달린 AI 앞에서 70퍼밖에 안 나온다는 건 둘 중 하나입니다. 안수진 중위가 아니거나, 위장한 안수진 중위거나. 안수진 중위는 충분히 그럴 능력을 갖췄습니다."
"우리가 알아보면 되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출동하겠습니다."
  
본인이 배남에게 일방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면 탈출했을 때 로비에서 경찰을 불렀을 것이라는 데는 한영교 중위도, 그 상부도 동의하는 바인 듯했다.
두 경찰관은 그 공감을 넘어서 그녀가 안수진 중위라는 사실, 그리고 안수진 중위가 뭔가 큰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순찰차가 차량이 아무도 없는 도로를 질주했다. 택시는 야간 운행이 금지되었고 버스는 다니지 않는 밤, 도망자가 피할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차가 터널을 지나 안수진에게 직진하기 직전,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자이 아파트 동남쪽 700미터 지점에서 붉은 사람 그림이 떴다.
붉은 사람 그림은 자꾸만 주의를 요구하며 번쩍였다.

"뭡니까?"

한영교 중위는 머뭇거리다가 마이크를 가리고 다른 사람에게 지시를 받는지 멀게 들리는 혼잣말을 했다.
다시 돌아온 중위는 굉장히 다급한 말투였다.

"지금 경고 뜬 것 보셨죠?"
"봤습니다."
"1급 안티 AI 해킹 수법을 쓰는 용의자가 발견됐습니다. 70퍼 목표물은 포기하고, 저 목표를 추적해 주세요. 여러분이 누구보다 가장 가깝습니다."

장주환 경사는 운전하면서 눈앞의 여자를 게슴추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10초면 닿는 거리에 있는 여자는 걷다 말고 순찰차를 의식하며 제자리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안수진 중위 같은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주요 참고인보다 더 중요한 게 있나요? 1급 어쩌고 해킹이 뭐죠?"

중위가 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말했다.

"보안 서약서를..."

주환이 한마디 하려는데 지완이 버럭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들었다 치고 그냥 말해요! 어디 가서 안 불 테니까!"

이유 있는 후배의 고함에 주환이 쓴웃음을 지었다.

"...누군가 CCTV 얼굴 인식을 막고 있습니다."
​"막아요?"

​주환이 되물었다. 한영교 중위의 목소리는 다급하다기보단, 짜증과 의구심이 섞여 있었다.

​"네. 화면을 보세요. 저기 동남쪽 700미터 지점."

​지완이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어두운 도로 위를 걷는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그런데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가 기괴했다. 마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진 직후처럼 얼굴 부분만 하얗게 날아가서 이목구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저게 뭡니까? 귀신은 아닐 테고."
​"적외선 반사입니다. 야간 모드 카메라는 적외선을 쏘는데, 저 모자가 그 빛을 정통으로 반사시키고 있어요. 덕분에 카메라 조리개가 빛을 줄이려고 닫히면서 주변은 까매지고 얼굴은 하얀 덩어리로만 찍히는 겁니다."

주환이 물었다.

"이런 거, 가끔 있지 않습니까? 빛 반사되거나 하면."
​"네, 가끔 있죠. 그런데 가로등 불빛으로 야간 모드가 아닌 카메라에서도 저 사람 얼굴은 계속 하얗게 나온다는 게 문제예요. 분명 특수한 모자입니다. 그래서 AI가 이걸 그냥 못 넘깁니다. 긴급으로 두고 계속해서 경고해요. 안수진 중위는 정보사입니다. CCTV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죠."

​한영교 중위가 말을 이었다.

​"저희 팀장님은 작정하고 얼굴을 하얗게 지운 사람부터 확인하라 하십니다."

​주환과 지완은 동시에 서로를 쳐다봤다. 답은 뻔했다.
범죄자는 얼굴을 가린다. 많이 가린 자가 수상하다. 하지만 다리 저는 여자는 5초 안에 확인할 수 있으니 먼저 확인하면 그만이었다.
두 사람이 무언으로 중위의 말을 무시하려 할 때 걸음을 멈췄던 여자가 마스크를 벗었다. 걷다가 숨이 차 벗은 듯했다. 그렇게 드러난 얼굴은 사진으로 본 안수진이 아니었다.
여자는 숨을 고른 다음 다시 마스크를 쓰고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저 '하얀 얼굴'은 아주 빠른 걸음으로 이동 중입니다. 이 밤에요."

주환은 육감이 틀린 점이 민망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되었다.

"친일파."
"네, 선배님."
"말 듣자."
"넵."

순찰차는 사이렌을 켜고 오른쪽으로 꺾어 일시에 4차선을 가로지른 뒤 지식산업센터 쪽으로 향했다.
다리를 절던 수진은 정밀 고무 가면 밑에서 숨을 몰아쉬며, 빛 속으로 재빠르게 멀어지는 순찰차를 바라보았다. 턱밑까지 따라붙었던 죽음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고마워요, 엄마.'

발바닥의 콩과 쌀알이 걸음마다 욱신거렸다. 다리는 후들거렸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하지만 가야 했다. 진실을 알려야 했다.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5179 1
    15908 창작또 다른 2025년 (11) 트린 25/12/18 41 0
    15907 일상/생각페미니즘은 강한 이론이 될 수 있는가 2 알료사 25/12/18 223 6
    15906 기타요즘 보고 있는 예능(19) 김치찌개 25/12/18 163 0
    15905 일상/생각무좀연고에 관한 신기한 사실 4 + 홍마덕선생 25/12/18 344 3
    15904 일상/생각조금은 특별한, 그리고 더 반짝일 한아이의 1학년 생존기 5 쉬군 25/12/18 282 25
    15903 IT/컴퓨터잠자고 있는 구형 폰을 네트워크 플레이어로 활용하기 9 Beemo 25/12/17 587 2
    15902 스포츠[MLB] 김하성 1년 20M 애틀랜타행 김치찌개 25/12/17 162 0
    15901 일상/생각두번째 확장 프로그램이 나왔습니다. 3 큐리스 25/12/16 374 5
    15900 창작또 다른 2025년 (10) 1 트린 25/12/16 176 3
    15899 일상/생각PDF TalkTalk 기능 업글 했어요.^^ 제 몸무게 정도?? 4 큐리스 25/12/16 348 2
    15898 경제2026년 트럼프 행정부 정치 일정과 미중갈등 전개 양상(2)-상 6 K-이안 브레머 25/12/16 300 5
    15897 음악[팝송] 데이비드 새 앨범 "WITHERED" 1 김치찌개 25/12/16 114 1
    15896 일상/생각불행에도 기쁨이, 먹구름에도 은색 빛이 골든햄스 25/12/16 335 13
    15895 IT/컴퓨터잼민이와 함께하는 덕업일치 9 Beemo 25/12/15 449 3
    15894 창작또 다른 2025년 (9) 2 트린 25/12/14 316 3
    15893 일상/생각 크롬 확장 프로그램이 승인이 났습니다. ㅎㅎ 16 큐리스 25/12/12 1010 32
    15892 창작또 다른 2025년 (8) 3 트린 25/12/12 313 1
    15891 오프모임12월 26일 송년회를 가장한 낮+밤 음주가무 모임 [마감] 22 Groot 25/12/12 834 8
    15890 정치전재수 사태 13 매뉴물있뉴 25/12/12 1095 3
    15889 일상/생각[뻘글] 철학자 존 설의 중국어방 문제와 LLM 은 얼마나 다를까? 13 레이미드 25/12/11 732 1
    15888 음악Voicemeeter를 이용한 3way PC-Fi -3- 제작, 조립, 마감 2 Beemo 25/12/11 294 4
    15887 창작또 다른 2025년 (7) 2 트린 25/12/10 358 2
    15886 일상/생각뭔가 도전하는 삶은 즐겁습니다. 4 큐리스 25/12/09 786 11
    15885 오프모임중꺾마의 정신으로 한 번 더 - 12월 9일, 오늘 저녁 광주에서 <점봐드립니다> 8 T.Robin 25/12/09 718 4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