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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5/12/06 11:05:08 |
| Name | 트린 |
| Subject | 또 다른 2025년 (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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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엄마는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속 채널A의 앵커와 패널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씻고 잘 준비를 마친 수진은 화장실에서 나와 엄마에게 잔소리를 시작했다. "또야?" 지워지기 시작한 염색, 슬슬 풀리는 파마머리, 주름투성이 엄마는 엹게 미소 띤 얼굴로 딸을 바라보았다. "응?" "몸 안 좋잖아. 빨리 자야지. 그것도 그렇고 차라리 드라마가 낫지, 맨날 뉴스 봐서 뭐해." "아냐, 얘는. 시사 상식 중요하잖아. 봐야지." 수진은 그래봐야 요새는 뭐든지 조작되었을 거라고 얘기하려다가 뒷말을 꾹 삼켰다. 조작을 주도적으로 하는 정보사란 조직에 속한 자신이 할 말은 아니었다. '내 손엔 피가 묻어 있어.' 소량이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야당 정치인, 여당이지만 윤석열이 싫어하는 정치인,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힌 반체제인사 들이 야구배트, 고무호스, 집게, 송곳, 드릴, 배터리, 물 앞에 서도록 만드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한국 모처의 지하 벙커에서 누군가는 신음하고, 누군가는 쓰러지고, 그렇게 쓰러진 유해는 어디론가 실려가 사라졌다. 말석이라고, 시스템에 속한 톱니바퀴라고 변명하고 싶지만 독일 석학 한나 아렌트가 이미 나치 전범 아이히만을 면담하다 악의 평범성에 대해 간파하면서 불가능해졌다. 그녀는 사유하지 않는 복종, 관료제적 분업 구조, 개인의 도덕적 사고 정지가 악을 돕고 만든다고 일갈했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자신은 나치 전범이었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열차 시간표를 만들고, 철로를 정비하는 악당이었다.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근데 우리 딸 안색이 안 좋아. 피곤해?" "응?" "직장 일 때문이야?" "아냐." "그래? 그게 아니면 너 운동 너무 세게 해서 그런 거야. 적당히 해야지." 엄마는 거실 한복판에 널린 아령, 벤치 머신, 벤치 머신에 올라간 바벨, 요가 매트 일습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운동을 권장하는 직종인 만큼 크로스핏과 권투는 바깥에서, 들어와서는 웨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크로스핏과 권투를 열심히 하는지는 신발장 위에 쌓인 각종 트로피가 증명하였다. "아닌데, 아닌데. 난 쌩쌩한데." 수진은 고개를 젓고는 재빨리 제자리에서 막춤을 추었다. 엄마가 활짝 웃었다. "아이고, 아이고 스무 살 넘은 우리 딸이 재롱 부린다. 아이고 귀엽다." 수진은 애써 웃으면서 이 집에 절대로 정치를, 바깥의 광풍을 불러오지 말자 다짐했다. 안 그래도 고혈압이다, 이석증이다 평소 몸이 약한 당신, 얼마 전엔 뇌동맥류를 진단받고 문제가 되는 풍선처럼 부푼 뇌혈관에 스텐트 시술까지 받았다. 넓디 넓은 주상복합 아파트 사서 모처럼 모녀가 모여 평화롭게 지내는 판이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넘어가자고 결심한 순간 인터폰이 울렸다. 1층 로비 겸 경비실에서 온 인터폰이었다. 수진은 벽걸이 디지털 시계를 쳐다보았다. 00시 11분이었다. '이 시간에? 누가? 왜?' 검은 SUV의 운전석 문이 열렸다. 배남이 비틀거리며 내렸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군복 상의는 단추가 두어 개 풀린 채였다. 보민은 지상 주차장에 세워놓은 캠핑카 뒤에 숨어 그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배남은 유리창으로 벽을 쌓고, 유리문으로 밀봉된 로비 형태의 정문 앞에 서서 비틀거리면서도 정중한 태도로 노크를 했다. 인포 데스크를 지키는 오십대 경비원은 안절부절 못 하다가 문을 열어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303호 안수진 집에 있나요? 나오라고 해요." "누구신지..." 배남은 가슴의 마크를 가리켰다. "공무입니다. 협의할 게 있어요." 당장 시간은 00시요 공무란 사람이 전투모도 안 쓰고, 옷도 제대로 안 여미고, 술냄새도 풍겼으니 믿을 구석 하나 없었다. 그 전에 서로 공무를 협의할 사이면 핸드폰으로 이야기가 오가서 문을 두드릴 일, 경비원을 통할 일도 없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콧방귀 끼고, 나가라든지 경찰을 부르겠다든지 했을 것이다. 하지만 계엄 당시 사람을 죽였던 부대 마크, 그리고 생중계됐던 그 피투성이 현장 영상은 우리나라 사람 누구에게나 발휘되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당장 자이 아파트 앞 붐비는 사거리 언덕에서 음주 단속하던 교통 경찰관도 보고도 넘어가는 판이었다. 경비원은 앓는 소리를 내며 데스크로 향했다. "일단 기다려보세요." 경비원은 인터폰으로 수진과 통화했다. 대화는 끝나지 않고 갈수록 길어졌다. 남은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무척 곤란해하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남이 소리쳤다. "바빠. 씨발, 시간 끌지 마!" 젠틀하게 해 줘야 할 때, 개처럼 나가줘야 할 때가 있었다. 지금은 개처럼 나가줘야 할 때였다. 물론 아직 미친개처럼 나갈 일은 아니었다. 경비원은 식은땀마저 흘렸다. 수화기에 댄 얼굴이 더욱 절실해졌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끈 끝에야 경비원은 배남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내려온답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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