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5/12/04 21:53:00
Name   트린
Subject   또 다른 2025년 (3)

3.
호프집 한쪽 벽면에 놓인 작은 텔레비전에서는 쉴 새 없이 YTN발 정치 관련 뉴스가 흘러나왔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사회통합추진위원회 회장, 김용현 자유대한민국수호회의 부의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우려에 대의원제의 장점을 설득하고-”
“박안수 자유대한민국수호회의 의장은 건강상의 이유로-”
“가나와 민주 콩고에서는 축전을 보내-”
"이재명, 우원식, 한동훈, 이준석 등 정치인 40명의 행방은 아직 묘연한 가운데 경찰은 이들이 해외로 집단 도주했을 가능성에 대해-"
     
탁자가 열 개인 호프집 내부에는 손님이 반이나 차 있었으나 속닥거리는 소리를 다 합해도 머리 위의 텔레비전보다 작았다. 사람들은 뭐에 쫓기는 듯 안주를 먹고 술을 마시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는 옆 탁자 사람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얼른 외면했다가 슬그머니 친구와 대화를 재개했다. 모두가 정보사, 국정원, 그 외 기타 알 수 없는 자들을 상상하며 행동했다.
가장 문 가까이 앉은 보민은 망설이다가 껐던 핸드폰을 켰다. 혹시나 싶어 시위 구경할 땐 꺼놓은 상태였다.
쌓인 카톡 메시지가 무려 88개였다. 보민은 유리잔에 담긴 소주를 한 번에 들이켜고 확인을 시작했다.
부대에서 휴가 시 안전하게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카톡 두 개, 광고 메시지가 다섯 개, 나머지는 모두 같은 부대 동기인 안지석 하사의 카톡이었다.

- 김보민 어디야?
- 왜.
- 우리가 얘기했던 것 기억나지? 모임 언제 할 거야. 너 빼고 다들 모였어.

보민은 인상을 찌푸리고 타이핑을 했다.  

- 보드게임 모임 말이지?
- 그래, 그거.

지석이 말하는 모임은 도청을 우려한 핑계였다. 그를 포함한 몇몇 하사들은 최근 몇 주간 야외에서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다. 처음에는 시위 진압 과정에서 가족이 부상당한 군인들끼리 모여 치료비와 보험, 좋은 병원 정보를 나누는 모임이었다. 하지만 갈수록 환자가 늘고 사연이 복잡해지면서 모임의 성격은 점차 '뭔가 해야 한다'는 쪽으로 흘렀다. 머리를 다친 지석의 여동생, 갈비뼈가 부러진 강원이 아버지, 눈 위를 방패에 맞아 시력을 잃을 뻔한 민수의 남동생, 밀려 넘어지는 바람에 팔과 허벅지에 타박상을 입은 보민의 어머니 등.

'그런데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뭐가 바뀌지?'

사실 처음보다 많이 부드러워지긴 했다.
계엄 초기에는 21시 통행금지, 주요 거리 간이 검문소 설치, K-151 현마 방탄 버전 소형전술차량 탑승 순찰대가 배치되었다. 하지만 반대 시위는 갈수록 커져 계엄법으로 입건한 인원만 15만 명이요, 구속이 1만 명으로 안 그래도 과밀화로 몸살을 앓는 교도소 측에서 비명을 질렀다. 통금의 불편에 대통령 지지층마저 항의하고, 안 그래도 안 좋던 경제 지표가 동반 하락하자 통행금지 시간은 22시, 23시, 24시로 자꾸만 늦춰졌다.
반대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만큼 자연스레 시위 진압 소요가 커져 경찰 기동대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는 상황에서 정부는 일반인들은 잘 알지도 못하고 사실상 특수부대의 말석 격인 특공연대까지 동원했다. 특공연대원들은 "안전한 대한민국 대테러 훈련 2025"으로는 시위 진압 기술을, 같은 기간 정보사에서는 사이버 안보나 북한과 결탁한 야권 정치인들을 청소해야 한다는 정신 교육을 받았다.
보민은 잠시 망설이다가 타이핑 쳤다.
     
- 난 빼줘라.
- 뭐? 야, 너도 이 상황이 잘못됐다고 했잖아. 지금 회원들 가족들이 어떻게 자꾸 안 좋게 되는지...
- 그래서 우리가 뭘 어쩌겠다고? 너네가 하려는 건 위험해. 나 오늘 만날 사람 있어. 그냥 휴가 잘 쉬다 갈게. 그때 보자.

지석은 뭔가를 쓰다 지우길 연발했다. 전자 검열을 예측하는 만큼 속시원히 내용을 적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예상을 뛰어넘어 지석이 큰 무리수를 두었다.

- 기억해, 보민아. 우리는 국민을 지키기로 맹세했어. 정치인들 권력 지키라고 군인된 거 아니야.

패기롭게 썼지만 카톡은 바로 삭제되었다. 지석도 흥분해서 쓰고 아차 싶은 모양이었다.
본인도 잘 아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뭘 어떻게 하겠는가. 항명? 반대 결의 성명 발표? 그리고 그 뒤는?
납치-고문-살해가 가능한 군사 정권 아래에서는 뭔가 확실한 한 방, 그리고 뒤를 봐주는 세력이 있지 않는 이상 다른 마음을 품는 건 불가능했다.     
보민은 한숨을 내쉬었다.

- 그냥... 조심해. 난 더 이상 그런 얘기 보기 싫어.

지석이 또다시 무언가를 두다다 쳤으나 보민은 알림을 끄고 인스타 앱을 켰다.
목적지는 슬프게도 전 여자친구 인스타.  

'복잡한 문제를 피해 복잡한 문제로 옮겨온 꼴이군.'

그가 엄마를 들먹이며 휴가를 나온 이유이기도 했다.
전 여자친구 안수진은 8개월 전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에서 열린 "안전한 대한민국 대테러 2025 연습"에 파견되었을 때 만났다. 그녀는 정보사 중위로 체포 작전의 일환인 타깃 디지털 채증 및 선동 대응 과목 강사였다.
두 사람은 보민이 연습장에 낙서하며 딴짓 할 때 이를 발견한 수진이 모른 척 넘어가주면서 만남을 시작했다. 수진은 사귀고 고백하기를, 보민은 잘생겼는데 심지어 자신의 스타일이라서 혹시나 싶어 안 말리고 넘어간 것이라 했다. 그녀의 고백은 보민이 하도 여러 번 말해서 주변 사람들이 외우기를 넘어 싫어할 만큼 평생 자랑거리였다.
반대로 보민은 그녀가 자신보다 지적이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자랑스럽게 여겼다. 수진은 학비 전액과 생활비 지원을 받으며 고려대 사이버국방학과를 나와 의무 복무 7년 제한으로 소위에 임관한 재원이었다. 이들은 보통 자대를 사이버작전사령부로 가지만 최상위권 성적 우수자나 특수 보직자의 경우에는 국군정보사령부가 뽑아갔고 수진도 이러한 경우 중 하나였다.  
그는 학업을 제대로 챙기지 않았고 독서도 싫어했다. 영화나 게임, 드라마도 오래 집중해야 해서 부담이었다. 대신 예능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공중파, 티빙, 디즈니, 넷플렉스에서 현재 하는 예능은 물론 일박이일 시즌 1, 무한도전, 런닝맨 같은 옛날 예능도 챙겨봤으며 유투브 인방판 역시 웬만한 흐름을 꿰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학업을 재능이자 성실함의 결정체라고 여겼고, 그렇지 못한 자신을 많이 부끄러워했다. 그러다 수진을 만난 보민은 운동 외엔 뭐 하나 꾸준히 한 적 없는 자신의 모자란 구석을 채워주는 첫 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제발.'

보민은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전 여자친구 인스타를 검색했다. 아이디는 검색이 불가했다. DM 대화도 그 전 대화는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새 메시지를 보내면 보내는 중에서 멈추며 읽음 표시도 뜨지 않았다. 태그나 링크로 들어가도 "사용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는 메시지만 그를 반길 뿐이었다.
수진은 한 달 전부터 아무런 설명 없이 헤어지자고 말하고 인스타를 포함한 모든 연락처를 차단했다. 차라리 설명이나 들으면 이해하고 마음을 추스를 텐데 왜 자신을 밀어내는지 모르는 건 눈이 뽑힌 채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과거를 되짚자니 속에서 슬픔과 고통이 밀려왔다. 보민은 소주 한 잔을 더 따랐다. 하지만 입가까지 가져가고도 감정이 격해져 감상으로만 흐를까 봐, 아껴서 단련한 몸에 해가 갈까 봐 잔을 내렸다 다시 올리길 반복했다.
결국 술잔은 찬 채로 남았다.  
보민은 정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무엇에 홀린 듯 새로 계정을 파서 수진의 계정을 들어갔다.
없었다. 수진의 계정은 아예 닫았는지 새로 판 계정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별의 이유가 새 남자친구로 환승해서는 아닌 것 같았다. 남자친구가 있다면 수진이 성격상 당당히 보였으리라.

'...아닌가?'  

기껏 6개월 사귄 여자친구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고 자신한다면 이는 거짓말이나 자기 기만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정을 알고 싶어. 난 이유를 알고 싶어. 얼굴을 보며 마무리를 짓고 싶어.'

인스타 DM으로만 헤어지는 건 너무 서글프고,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방법 같았다. 특히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한 자신은 그런 대우를 받아서는 곤란했다. 보민은 쿨하지 못한 걸 알지만 수진을 만나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최소한 노력은 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김보민은 쌀쌀한 겨울 공기에 잠시 서 있었다. 구로역 광장의 밤은 평소보다 한산했다. 몇 달 전만 해도 근처 지식센터의 젊은이와 공구상가의 중장년 들로 북적이던 거리는 이제 간간이 지나가는 행인들과 순찰차만이 오갔다. 통행금지는 아니었지만, 밤 10시 이후 모이기를 자제하라는 '권고' 때문인 것 같았다.

보민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지하도를 지나 구로NC백화점으로 향했다. 지하도를 나올 때 보이는 불빛 가득한 야경은 희망찬 미래를 약속하는 모습 같았다. 당연히 혼자만의 상상이고, 굳이 따지자면 논리 없는 미신이지만 꼭 그래야 했다.  
수진이네로 가는 길은 가파른 아스팔트 언덕을 올라가야 했다.
언덕을 반쯤 올랐을 때, 뒤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서울에서 차는 새보다 많은 것. 보통은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그 소리가 너무 불규칙했다. 가속과 감속이 들쑥날쑥했고, 한 번은 연석에 부딪히는 소리도 났다. 보민이 뒤돌아보니 보도 옆 도로를 타고 검은색 SUV가 비틀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차 앞유리창에는 '공무'라는 스티커가 선명했다. 규정 탓에 선팅이 약한 차는 운전석의 모습이 훤히 보였다.
보민은 보자마자 제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배남 중사?'

이름도 특이하거니와 육군과학화전투훈련단에서 교육받았을 당시 수진이와 같은 교관 신분이었고, 독대해서 대통령의 폭탄주와 계란말이를 먹었다는 둥, 내가 혁명의 주인공이고 이를 국모가 인정했다는 둥 말이 많아서 잊을 수 없는 그 얼굴이었다. 뱀 같은 눈에 걍팍하게 생긴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오른 채 핸들을 잡고 있었다.  
차는 비틀거리면서도 빠르게 언덕으로 올라갔다.
보민을 스쳐지나가는 뒷유리의 특전사 마크는 유난히도 선명했다. 보민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닌지 지나가던 행인 두어 명이 놀라지도 않고 차에서 간격을 벌리며 멀어졌다. 언덕 위 교통섬에 있던 교통경찰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았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다른 쪽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권세가 위풍당당한 계엄 시대의 군인에, 쿠데타의 주력인 707이라서 넘어가는 게 분명했다.
그나저나 배남은 여기 웬일일까?
     
'우연인가? 아니면...'
   
보민은 날카로운 칼에 찔린 듯한 고통을 느꼈다. 순간 숨까지 차면서   눈물이 살짝 솟구쳤다. 아까의 희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급작스러운 비탄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좀 전까지 그를 응원하는 것 같던 건물의 밝은 조명들은 순식간에 권력이나 학식 어느 하나 가진 것 없는 그를 비웃는 조롱처럼 느껴졌다.
보민은 자꾸만 고개를 저으며 차를 뒤따라 빠르게, 하지만 들키지 않게 언덕 위의 자이 아파트 단지 정문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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