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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12/10 20:01:30수정됨
Name   트린
Subject   또 다른 2025년 (7)
7.
수진은 우선 경비원에게 알아서 할 테니 일 보시라 말했다. 경비원은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인포 데스크 쪽으로 돌아갔다. 야식을 배달한 배달 기사가 무슨 일인지 살짝 관심을 보이며 스쳐 지나갔다.
그 사이 만취한 남은 애써 안 취한 척, 멀쩡한 척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그래 봐야 입에서, 마시다 쏟은 가슴팍에서 술냄새가 나니 별 차이는 없었다.

'가당찮아.'

어떻게 사고는 안 났는지 모르겠다. 반사신경이 좋은 걸까, 운이 좋은 걸까?

"드디어 만났군."
"네, 무슨 일이시죠?"

남이 혀를 찼다.

"완전히 모른 척하네. 날 여기까지 오게 시키기, 이렇게 무리하게 행동하게 만들기는 문제가 있잖아. 이젠 시대가 좋아져서 여자가 먼저 대시해도 흉이 아닌데 꼭 이래야겠어?"
"네?"
"우리는 특별한 사이가 될 사람들이잖아. 솔직한 마음을 보여주라고!"
"네?"

묵직한 연타에 수진은 머릿속이 비어버렸다. 살면서 보고 겪은 사실을 총합해 대충 어떤 패턴일지는 예상했는데 그 수위가 마치 핵발전소 덮친 쓰나미처럼 높고 거칠었다.
남의 목소리엔 짜증이 배어 있었다.

"아니, 의외라는 거야? 설마 그건 아니겠지. 네가 먼저 꼬리치고 이게 뭐야. 내가 애써 와줬는데 이런 푸대접이 어딨어. 남자만 힘들게 만드는 게 공평해, 안 공평해."
"꼬리라뇨. 뭔가 오해가 있군요."
"뭔 오해. 세상 그렇게 살면 안 돼."

아무래도 길고 힘든 밤이 될 것 같았다.
수진은 심호흡을 했다.

"그쪽에서 계속 반말하니까 나도 반말할게.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냐. 난 네가 여기에 왜 왔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알았어?"

남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이 커졌다.

"이게 뭔 내숭이야. 너 예전 교장에서 교안 다듬을 때 신현미 하사랑 잡담하면서 남친은 안 그래도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이 서로 근무 패턴 이해하고 생각도 비슷해서 좋다고 했어, 안 했어."
"내가?"
"그래. 그러면서 그랬잖아. 운동도 잘하고, 듬직하고, 친절하고, 본인 일에 열심인 사람이 좋다고. 그걸 왜 나 듣는 데서 해? 하필이면 남자는 사무실에 나 한 명밖에 없던 그때 그 순간에. 당연히 나 들으라고 한 거잖아."
"...내가?"
"대인 제압 시연 때도, SY-44(*레밍턴 모스버그 590 산탄총을 개조하여, 총구에 최루탄을 넣어 발사 가능하게 만든 대한민국 고유 장비) 구형 장비 시범 시연 때도 나만 바라봤잖아."
"대체 뭔 소리야."

추측컨대 남은 수진에게 호감을 품은 상태에서 들리는 모든 말과 상황을 본인에게 유리하고 유쾌한 쪽으로 짜맞추는 데 달인인 것 같았다.
배남을 의식한 적이 없어서 투명인간 취급한 게 오히려 오해의 소지가 생긴 모양이었다.

'당장 같은 직종이고, 운동도 잘하고, 듬직하고, 친절하고, 본인 일에 열심인 사람은 보민 씨야. 네가 아니야!'

보민 씨가 여기 있다면. 그 든든한 덩치에 강한 힘으로 이런 놈 따윈 한 방에 날려버릴 텐데. 하지만 그는 이제 과거의 사람이고, 자신은 이 칼처럼 생긴 이상한 말라깽이 앞에 혼자였다.
기억 안 나는 소리만 자꾸 해대는 주제에 남은 억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짜 다 모른 척할래? 그것도 그렇고 내가 그 전날 각하 뵙고 술 3차 달리고 피곤해서 창고에서 자고 있을 때 나 찾아서 꿀물 주면서 걱정했잖아. 왜 사람을 자꾸 안달나게 해? 이거 시험하는 거야? 억지로 시간 내서 왔는데 나 자꾸 화나게 만들래?"

처음으로 기억에도 있고, 구체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상황이 나왔다.

'꿀물 같은 소리 하네. 그건 솔의눈이었거든? 그리고 호랑이가 찾아오라는데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싫어요 하냐. 시키면 하는 게 군대인 것 몰라? 찾으라는 게 좋아하는 거면 호랑이가 너 좋아하나 보다.'

억울함이 끓어올라 한 소리하다가 문득 이 사람은 만취했고, 만취한 사람이랑은 길게 얘기해 봐야 시간 낭비란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무어라 말한들 기억은 날아가 내일 또다시 말해야 한다. 이미 이 사람은 오해로 점철된 기억을 품은 스토커지만 그나마 맨정신일 때 상대하는 게 편했다.
수진은 그가 뭐라든 상관없이 뒷 이야기를 다 들은 다음, 반응이 없어 약간 무안해진 남에게 말했다.  

"너 취한 건 알지?"
"그런가?"
"솔직히 많이 마셨잖아. 물도 많이 먹으면 배불러. 사람이 술을 먹었는데 아예 영향이 없을 수는 없지. 그건 인정하지?"
"음."
"일단 이 근처 숙소 잡고 자고 내일 아침에 와. 안 본다는 것 아니니까. 그때 더 얘기해."

남은 고개를 저었다.

"난 술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들고, 사람 사이에 윤활유가 되는 좋은 수단이라 생각해. 내가 너 솔직하게 만들어줄게. 우리 술 한잔 하자. 얘기나 더 하자."

이제 끝이었다.
더 이상 말하면 안 되겠다 싶어 수진은 경비원을 다시 부를 생각이었다. 경비원에 경찰관까지 부르면 어떻게 될 것이다.
남의 눈이 매서워지더니 왼손으로 살짝 빠지려는 수진의 팔목을 붙잡았다. 한편 오른손으로는 언제 어디서 뺐는지 모를 글록 17 권총이 수진의 복부를 겨누었다. 위를 둥글게 마무리해서 뺄 때 옷자락에 걸리지 않게 만든 도트 사이트, 총열 아래엔 적외선/레이저/플래시 일체형 라이트가 달린 것으로 봐서는 무려 707 표준 지급품이었다.
최소한 심각한 음주운전이 운인지, 아님 반사신경 덕분인지는 알게 되었다.  
남은 수진을 끌어들여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권총이 크게 눈에 띄지는 않을 정도로 가깝게 만들었다.
수진의 등에 급작스레 땀이 솟았다.
남이 속삭였다.  

"소리 지르지 마. 날 젠틀하게 대해 줘. 밖이 싫으면 네 집에서 한잔 해."

그나마 희망이 있는 공공장소를 벗어나, 엄마가 있는 집에 이 미친놈을 데려간다?

"싫어. 절대 안 돼."
"하, 나. 요샌 뭐 먼저 불러놓고 튕기는 게 유행인가. 지금 주변에 몇 명 있어?"

대충 경비원 아저씨 2명에 야간 청소원 아주머니 한 명 총 세 명이었다.

"내가 저 사람들 다 쏘고 간첩으로 몰 수 있다는 거 알지? 혐의가 있어 일단 체포하려고 쐈다면 그만이야. 뭐가 안 나오겠지? 그래도 어쩌라고. 내게는 생사여탈권이 있어. 그러니까 707에도 있고, 캐니스터도 만지지. 난 대한민국 판사 겸 검사 겸 첩보원 겸 사형집행인이다 이거야. 내 말 들을 거야, 안 들을 거야?"  

수진의 눈이 커졌다.
드디어 들었다. 추측이 사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놈은 알고 있었다. 만진다니 심지어 직접 실행하는 자였다. 난데없이 총 앞에 섰다는 놀라움과 공포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핸폰에는 캐니스터 사진이 들었을까? 카톡에는 이를 상의하는 내용이 남아 있을까?

'당연하지. 저렇게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해 과신하고, 자신 위주로 세상이 돌아간다고 굳게 믿는 놈이 말을 삼갈 리 없고, 기념 사진을 참을 리 없어. 심지어 뭔가 더 화끈하고 더 과격한 사진으로 존재 가치를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썼을 거야.'

그게 아니더라도 만약 헬기에 탑승했다면 기기에 gps 좌표가 남는 만큼 핸드폰 자체가 증거였다.
놈을 무력화하고 핸드폰을 가져야 했다.

'가능해.'

자신에게는 숨겨놓은 전기 충격기가 있었다. 당연히 옷 위로도 된다지만 상대방의 완력이나 옷 두께에 따라 전극이 제대로 안 꽂혀 전기총격이 덜 들어가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만약을 대비해 상대방을 무방비 상태로 이끌어야 했다.
놀랐다가 왠지 모르게 좋아했다가 다시 굳어진 수진의 표정을 오해한 남이 말했다.

"동작 그만. 핸폰 내놔. 천천히. 티나게는 안 돼."

수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판사, 검사, 경찰관 다 못 믿는 세상이어서 하니 마니 하는 판인데 자칭 판검경사형집행인 놈이 신고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
"웬일이지."

엄마를 보호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놈도 원하고 자신도 원하는 곳이 집이 되어 버렸다.
아니다. 길게 보자면 이게 엄마를 보호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일부 속죄하는 길이기도 했다.

'바로 방으로 데려가야지. 엄마한텐 뭐 줄 게 있다고 둘러대면 너무 걱정 안 하시고 또 속을 거야. 엄마는 날 믿으니까. 그럼 엄마랑 저놈이랑 길게 접촉할 일이 없어. 그리고 속옷 한두 장 널린 여자 방에 들어왔으니 이놈은 싱글벙글 마음을 풀겠지. 술도 더 먹여서 마음도 풀고 저 레인저후디 파카도 풀고. 그리고 전투복 상의 단추도 몇 개 풀고 그 다음에 파파박. 그럼 끝이야. 핸드폰 속 데이터랑 내가 가진 데이터랑 합치면 전 세계에 이 핏빛 헛짓을 폭로하기 딱이야.'

수진은 온 정신력을 끌어모아 웃음을 지었다.

"좋아."
"...뭐?"
"좋다고. 우선 내 말은 우리 집에서 이야기 해 보잔 거야. 난 아직 너랑 사귈 생각은 없어. 서로 오해도 많은 것 같아. 하지만 넌 흥미로운 사람이긴 해. 그래서 이왕 온 김에 편한 자리에서 끝까지 이야기해 보자는 데 동의해. 인정하긴 싫지만 네 제안, 나쁘지 않은 방법이야."

남이 히죽거렸다.

"진심인가 본데."
"진심이지 그럼."

남이 글록 17을 왼쪽 겨드랑이 밑 홀스터에 넣었다. 나올 때만큼이나 빠른 회수였다.

"이건 필요없겠군. 그래도 핸폰은 아직이다?"
"맘대로. 맥주 마실 거야? 네 캔쯤 있어."
"소주가 좋은데."
"소맥 말아줄게."
"그것도 좋지."

수진은 말할까 말까 하다가, 오해의 여지를 없애고 확실히 밝히는 게 옳다고 생각해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 두지만 난 엄마랑 살아. 엄마는 보수적이고 날 걱정하셔. 모든 엄마들이 그렇잖아. 이 야밤에 처음 보는 남자를 데려오는 걸 누가 좋아하시겠어."  

남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수그리는 모습을 보자 이놈에게도 엄마가 있긴 있구나 싶었다.

'네가 죽인 민간인들도 다 엄마 아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건 상관없어? 까먹고 사니?'

"하지만 엄마한테 내가 너 급한 업무 때문에 왔다고 말할게. 혹시 화나 짜증을 내셔도 얼른 내 방으로 들어가. 알았지? 내가 안주랑 갖춰서 올게."
"걱정 마셔."
"엄마한테 잘 보이려는 내 맘 이해하지?"
"그럼. 미래의 장모가 될 수도 있는데, 크히하하하."

뭐래, 미친놈이.
수진은 간신히 밝은 표정을 유지하고 그를 엘리베이터로 잡아 이끌었다. 인포 카운터를 지나치며 눈 인사하니 경비원들은 눈에 띄게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뭐가 뭔지는 모르지만 잘 해결되었다.
경비원들과 청소 아주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계속 바뀐 잔혹한 운명을 상상도 못한 채 길고 피곤한, 하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야간 업무에 다시 주의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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