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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8/17 20:18:27
Name   二ッキョウ니쿄
Subject   어느 흔한 여름 날

흔한 일이었다.
몇 명 뽑는다는 자리에 수백, 수천명이 지원하니까. 분명히 흔한 일이다. 이걸 알기까지 삶이 많이 무거웠다. 서류 하나, 둘, 셋. 무뎌지는 느낌으로 꾸역꾸역 빈칸을 메꿨다. 전공, 영어점수, 얼마얼마.. 긍정적인 마인드.. 사회경험.. 긍정적... 일종의 다짐같은 자기소개서였다. 그것은 소개라기보다는 각서였다. 할 줄 아는 것도 없지만 못 하는 것도 없을 것처럼 글자를 빼곡하게 박았다. 그리고는 조금이라도 불편해 보이는 문장들을 툭, 툭 잘라내었다. 소설을 이렇게 썼으면 등단했을까? 어쩌면 우리 시대에 문학이 외면받는 이유는 이미 거짓 없이는 삶을 지탱할 수 없어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서류를 넣었을 때가 언제였더라. 서류통과 연락이 올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면접장에 가려면 정장을 구해야 하는데 따위의 생각이 머리 한 켠에서 떠나질 않았고, 입은 안될거라고 안될거라고 중얼거려보아도 이미 마음은 취업을 한 것 같았다. 합격자는 개별적으로 연락합니다. 나는 개별적인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 어쩌면 인생에는 다들 그런 시기가 있을 뿐이라고 믿어볼 법도 하지만, 종교도 운명도 없다고 믿는 유물론자의 삶에서 굴곡이란 그저 그 자리에 분명히 존재하는 나의 가치일 뿐이었다. 삶이 굴곡져 가라앉은것이 아니다. 내가 가라앉아있는 곳 밖에 있을 곳이 없다.


최초에는 선배, 누나, 형들이었다. 그 다음은 나일줄 알았다. 순서는 으레 그러한 법이니까. 그런데 다음은 친구가, 그 다음은 동생이, 또 그 다음은 후배였다. 은행의 창구에서 번호표를 뽑고 순번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었음에도 으레 그러하리라 기대했다. 유독 못나게 산것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괜찮았다. 나만 그런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기로했다. 네번째, 다섯번째, 여섯번째, 서른, 마흔, 쉰 다섯번째. 더 이상 세는 것을 포기하고 모니터를 끄면, 까매진 액정에 비친 눈이 어릴 적 아르바이트 한다고 봤던 수산시장의 죽어가는 생선 눈깔같았다. 반달을 갈아낸 듯, 거무튀튀하고 피얼룩이 진 두툼하고 무거운 칼이 물줄기를 때린다. 산산히 부서지는 물방울이 도마위를 흐르고, 이내 퍼덕이는 생선의 머리가 동강이나서 싱크대로 튕겨나간다. 죽음을 관장하는 신에게는 고무장갑과 앞치마와 장화와 뽀글머리가 어울릴거라는 생각을 했다. 잠깐 눈을 감으면 그렇게 텅, 하고 누군가 목을 뚝 끊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인하지 않은 단톡방에는 누군가의 합격소식이 들린다. 흔한 일이었다. 지나고보니 떨어진 사람들보다 붙은 사람들이 흔해져 있었다. 나는 흔하지 않았다. 이걸 알기까지 삶이 많이 무거웠다. 결국 한 번도 가벼워 진 적이 없는 셈이다. 지금 디딘 곳은 어딜까. 이럴때는 스마트폰 뱅킹어플이 좋은 역할을 해준다. 잔고, 8만3천 489원. 청구서를 꺼낸다. 학자금 이자내역도 본다. 대충 잔고보다 열배쯤 많은 돈이 나가야한다. 서늘한 냉기가 어깨를타고 살포시 내려가기 시작한다. 한 여름에도 피부 껍데기가 오소솟 일어나는 추위를 느끼기에는 빚만한 것이 없다.


컴퓨터를 끄고, 스마트폰도 끄고, 불도 끄고, 모든 창문을 싹 닫는다. 가만히 있으면 새까만 어둠덕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방 한가운데에 가만히 있으면 이렇게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이내 취업준비를 핑계로 변변찮은 운동을 하지 않은 허리에서 오래 앉아있는 것에 불만을 터뜨린다. 지끈거리는 허리를 쥐니 어째 웃음이 난다. 이토록 명백하게 살아있음에도 착실히 죽어가고 있다.


어느 기사에서 20대 후반 남자들의 자존감이 벼랑끝에 있다고 했다. 서류를 몇 번 떨어지다보면 그런건 벼랑이 아니라 이미 해저로 쳐박혔던 것 같은데.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난 그랬다. 각자의 멘탈이 견뎌주는 정도가 다르지 않겠나. 개성의 시대잖냐. 개성있는 이력서를 만드는 것에 실패한 사람의 공허한 외침이다. 남들보다 모자란 것 없이 개성있으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게 된 것도 그러고보면 최근이다. 삶을 너무 안일하게 살았다는 생각이 번뜩, 든 것도 이미 옛날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아니다, 우리 아버지는 인생을 안일하게 살면 안된다고 하셨다. 생존자의 말은 귀담아 듣는 것이,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연한 기대로 안일하게 살았나 보다.


흔한 일이었다. 이러다 결국 사회 틈새 어딘가로 소리없이 슥 사라지는 사람들도. 흔한 사람들은 흔하게 사라져갔다. 흔하지 않은 사람들이 흔한 사람들로 빼곡하게 채워져있다.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어디로 사라져갈까. 이름모를 회사에 열정과 긍정으로 가득찬 A씨의 인간상을 열심히 써 내고, (사실은 하도 지겹게 써 대서 순식간에 완성했다. 열심은 무슨.) 이것 자체가 하나의 일과처럼 자리한 하루를 보낸다. 띠링, 형 저 합격했어요. 축하해. (씨발). 날씨가 더운데 건강 조심하고. 네, 형도 잘 지내시죠. 그럼. (씨발). 언제 한번 봐야지. 형 시간 되실때 봐요 제가 쏠게요. (혹시 총으로 쏴줄 수 있겠니) 야 기대해야겠다. ㅋㅋㅋ형 그럼 연락주세요. 그래. 띠로링.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여러분, 모두 부~ 자 되세요. 젊음, 지킬것은 지킨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이 세상 최고의 브랜드는 당신입니다. 사람이 미래다. 헤브 어 굿 타임. 우리는 젊음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어릴 때 봤던 광고가 하나 둘 떠오른다. 나는 어떤 광고에서도 볼 수 없었던 자리에 있다. 생경하고, 생소했으나 결국 있다. 아주 흔한 일이라고, 그래야만 한다고 다짐했다. 자기소개서처럼. 깎여나가고 문드러져 흩어진 것들은 풍화되어 이미 온데간데 없고, 나는 점점 더 알맹이뿐인 무언가가 되어 홀로, 홀로 그것은 흔한 일이라며 다가닥 다가닥.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다가닥 다가닥. 헌신과 기여, 잘 할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다가닥 다가닥.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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