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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2/26 01:21:27
Name   221B Baker 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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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무해한 음모'에 부쳐: 대체로 무해한 음모(a mostly harmless scheme)




저는 결혼과 가정이라는 제도 역시 자본 축적의 논리에 따라 그 운명이 좌우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는 가정이 노동력을 재생산하고 관리하는 기능을 (보이지 않는 비용을 부담하면서)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본과 공존할 수 있었지만, 그 보이지 않는 비용전가가 개인(특히 여성)의 자본축적 기회를 대거 박탈하는 대가로 자본을 증식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경제학 지식 확산과 수 세대에 걸친 '자본주의화'의 결과로) 깨닫게 된 사람들이 더 이상 부당한 관계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 이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싸움의 핵심인 것이죠. 그리고 여기에서 페미니즘과 빈부격차(더 넓게 말해 계급론)의 접점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본은 이에 굴복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끊임없이 빈틈을 찾아 새로운 축적 기회를 모색할 겁니다. 우선  결혼과 가족제도를 통해 (결혼 비용, 주택 구입 비용 등) 제도의 유지와 확산에 필요한 시장을 창출해내기 힘든 상황이 되면 1차적으로는 (1) 이를 장려하고 촉진하는 사업(중매, 교제 알선 등)을 만들어내는데 만약 소비자(시민)들이 교제 자체에조차 흥미를 잃게 되면 (2) 1인 가정, 동거, 주택 공유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정상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함으로써 그에 필요한 소비의 수요를 끌어내겠죠.

무엇보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해체시켜 각각을 상품화하고 시장화하려는 자본의 추동력은 이미 현대 가족의 풍경을 과거와는 판이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청소, 주택 내외부 관리 등 전통적인 가족이 내부에서 처리하던 기능들은 이미 시장화된 지 오래이며 그 가족이 형성되는 과정(연애, 중매 등), 가족의 교육 기능, 오락 기능, 휴식 기능 역시 낱낱이 분해되어 '전문가'에게 맡겨지고 가족은 오로지 그에 필요한 돈을 공동으로 관리하는 기능과 함께 재생산의 기능으로만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겁니다.

(첨언하자면 저는 현대 문명의 세 가지 큰 동력 중 하나가 '실제의 가상화'라고 봅니다. 삶의 수많은 활동(번식, 섭식, 육체노동 등에서 쾌락만을 분리시켜 오로지 즐겁기만 한 가공의 경험을 할 수 있게 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게 하는 것이죠. 시장과 자본은 그러한 삶(경험)의 해체와 재조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한편 분업은 이러한 소비 측면의 삶의 분리와 해체에 대응하는 생산 측면의 분리와 해체다. 나머지 두 가지 동력은... 영업비밀입니다.ㅎㅎ)

하지만 생산의 자동화와 기계화가 약진하면서 노동의 가치가 급락함과 동시에 사람들은 더 이상 재생산에 큰 가치를 두지 않게 되었죠. 무엇보다 재생산을 통해 가족이 담당하던 구성원의 복지와 부양 기능이 핵가족화로 인해 유명무실해지면서 재생산은 개인에게 별로 이득이 남지 않는 장사가 된 겁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 전체가 부양과 피부양 기능을 공유할 수 있도록 국가가 (대체로 조세를 통해) 지도하고 강제함으로써 개인 차원의 재생산을 공동체 차원의 문제로 치환한 것이 바로 복지국가죠. 그러나 이러한 제도와 그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가족제도만 형해화된 정치체의 구성원들은 자연스럽게 재생산(결혼과 가족 형성)을 포기하는 합리적인 선택을 합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그에 맞는 시장을 발견하고 창출할 겁니다. 그러나 결혼/가정 시장이 다른 시장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그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노동자가 생산요소인 동시에 곧 소비 주체라는 점입니다. 소비자가 창출되지 않는다면 모든 시장이 곧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므로 어떻게든 소비자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자본의 지상과제가 됩니다.

그 한 가지 방법은 개개인이 더 많은 소비를 하게 만드는 겁니다. 허나 현대 인류는 이미 과거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1인당 소비를 하고 있으며 그 추세는 꾸준히 상승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추가적인 개인 소비 증가가 유효하겠지만 주마가편에는 한계가 있을 겁니다. 결국 더 확실한 해결책은 소비할 수 있는 개인을 더 많이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요?

여기서 자본주의 세계 체제 분석으로 유명한 역사학자 조반니 아리기를 소개할까 합니다. 아리기는 자본축적체제의 발전과정을 설명하면서 매 단계마다 자본축적을 선도했던 정치체들이 비용을 내부화하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경쟁정치체들을 따돌리고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즉, 네덜란드는 보호비용(군사 특히 해상교역로 보호를 위한 해군력)을 내부화하여 앞선 시대의 도시국가체제를 극복했지만 생산비용(농산, 공산물 생산)까지 내부화해낸 영국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영국은 또 다시 법인과 수직계열화라는 혁신적인 제도를 통해 거래비용까지 내부화한 미국에게 패권을 넘겼다는 것이죠.

흥미로운 점은 그 다음 축적체제가 내부화할 대상에 대한 아리기의 예측입니다. 그는 미국이 하지 못한 '재생산의 내부화'에 성공하는 정치-경제체제가 다음 패권을 차지하리라고 봤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자본이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러시아식 유머 아닙니다.)

그런 맥락에서 지난 주 <이코노미스트>의 표제가 '인간을 만드는 다양한 방법'이었던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법적, 윤리적 근거가 어떻게든 마련된다면 (물론 이 자체로도 big if지만) 인간을 풀빵찍듯 찍어낼 날이 생각보다 멀지 않았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어느 선진국보다 빠르게 초저출산과 초고령화 문제에 맞닥뜨린 한국이 그러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추진하기에 적절한 위치가 아닐까 합니다. 이민에 대한 반감과 외국인 혐오, 국수주의로는 세계 수위권을 다투고 있기도 하거니와 세계적으로도 이민이 (늘 그렇듯이) 첨예한 정치경제적 논쟁거리였고 심지어 초강대국의 대선까지 좌우한 의제였다는 점에서 사람들이 차악의 수단으로 받아들일 여지도 있지 않을까 아주 조심스레 짐작해봅니다.

물론 국가적 합의가 도출되고 정치, 경제, 기술 역량이 총동원될 기반이 만들어지는 것 자체가 지금으로서는 난망한 얘깁니다. 게다가 정말 어찌저찌해서 국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죠. 여기 걸린 윤리적, 법적, 기술적 난관은 국제정치와도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에  기껏해야 '중견국(middle power)'이라는 명함을 수줍게 내밀어보는 한국이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하려고 하면 강대국들의 극심한 견제와 압박이 들어오리라 예상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겁니다. 그래도 여성을 출산기계로 간주하는 '무해한 음모'보다는 조금 낫지 않을까 합니다. 그 덕분에 일자리도 더 생길 것이고 말이지요.





10
  • 분석은 추천
  • 추천!
  • 제목만 보고 문제의 그 소리가 씨알도 안 먹힐 소리라는 것을 분석한 글인가 했는데… 하여튼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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