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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6/02/01 08:07:37수정됨
Name   kaestro
Subject   팀장으로 보낸 첫달에 대한 소고
팀장이 돼서 제일 문제인 게 뭐냐는 질문에 내가 했던 대답 중에 "이러고 사는 게 제 적성에 맞아요"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정말 그게 사실이다. 내 입장에선 이 정도까지 나를 스스로 몰아붙여야 하는 일이 처음이었다 보니 꽤나 고된 일정이었다.

내가 처음 회사에 들어오면서 들었던 이야기는 제품의 방향성이 없으니 잡아줄 것, 그리고 제품 개발 프로세스를 효율화해 달라는 것이었다. 제품 방향성을 잡아달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솔직히 그때에는 전혀 이해를 못했다. 만드는 기능들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뜻인가? 내가 여태 다니던 회사들이랑 동일하게 이것저것 중구난방으로 이거 하면 좋지 않을까요? 하고 있으니까 그걸 쳐내 달라는 것인가? 다 맞는 소리였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고 발생하는 현상들이고, 문제부터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굉장히 심각한 일이라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제품을 만들기 이전에 가장 중요한 질문인 '우리 제품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게임들을 평가할 때 이 게임은 누구한테 팔아먹으려고 이런 식으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는 소리를 그렇게 많이 해놓고 정작 내가 이 일을 맡게 된 시점에는 내가 할 일이 그것이란 생각을 못했단 것은 어찌 보면 굉장히 우스운 일이다.

물론 회사에서 정해뒀던 고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 제품은 기획서를 만들어주는 물건이므로 기획자와 개발자가 사용하는 물건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어느 정도 규모의,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는 기획자와 개발자가 사용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의와 합의가 없었다. 또한 인하우스에서 개발에 직접 참여하는 인원이 기획자, UI/UX 디자이너, 개발자뿐이었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한계도 명확했다. 우리 제품은 이미 기획서에 해당하는 기능을 개발할 것이라는 것이 확정된 이후에 기획을 한다는 암시적인 명제가 있었고 그것이 제품에 이미 담겨져 있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드는 의문은, 제품을 기획하는 단계에서 우리가 이미 배제하고 있는 '이 기능을 만들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의사결정 과정은 기획서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에 포함되지 않는가였다.

이를 위해 내가 진행한 프로세스는 우선 우리 팀부터 기획서를 작성하고, 그 과정에 우리 제품을 이용해서 기획서를 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기획서를 쓰는 데에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는 결국 이 제품을 왜 만들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게 이 형태는 왜 이렇게 나와야 하는데?에 대한 설득의 과정이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 기능을 만들기로 했으면 만드는 것은 요즘은 예전보다는 훨씬 쉽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만들고 나면 그걸 갈아엎고 다음의 기능을 넣고 하는 것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의사소통을 통한 시간 소요가 발생한다. 기획서는 사실 그걸 줄이기 위해 필요한 물건인데 문제는 기획서라는 물건을 만드는 것이 생각보다 너무 어렵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다음에는 아마존의 Working Backwards 워크숍을 모방한 워크숍을 진행했다. 일종의 재미로 시작한 과정을 통해 고객군을 명확하게 타겟팅하고 고객이 타겟팅됐을 때에 고객 가설, 문제 가설 등을 세우면서 assumption map을 작성했다. 해당 assumption map들을 검증하기 위해서 인터뷰 때에 해야 하는 질문들에 대해서도 도출해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기획서는 작성자와 이를 주기적으로 받아보는 실무자의 입장에서는 작업하기에 편한 형태로 작성돼 있지만, 이를 검토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편하다는 사실을 도출해낼 수 있었고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나름의 아직 찾아보기 힘들었던 해결방법을 고안했고 그것이 회사 제품의 2.0인 spark에 담아내려고 하는 기능이다. spark는 아이디어가 들어가는 순간 스파크가 튀듯이 반응하는 제품이라는 의미로 지었다.

내가 회사에서 팀장으로 꼽히게 된 이유는 팀장으로서 제품의 방향에 내 영향력이 강하게 미치기를 원했고 회사에서도 그런 사람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때문에 내가 하는 일들은 이전에 해본 적이 없기에 짧은 시간에 정말 많은 시행착오도 겪고 있고 많은 걸 배웠다. 나는 위에서 이야기하는 제품의 방향성에 대한 불만이나 방향성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은 많았지만 사실 나도 그게 어떤 일인지에 대해서는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이렇게 많은 게 모자란 사람을 믿고 팀장의 자리를 맡겨준 회사와, 대체 뭘 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를 믿고 한 달이나 열심히 일해준 팀원분들께 감사한다. 그런 의미를 담아 사실 며칠 전 책 선물과 편지도 한 장 드리긴 했다.

다음 달도, 그다음 달도 아마 계속해서 나는 모자라겠지만, 팀원들 앞에서는 자신감 있는 척을 하며 발버둥쳐 봐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발버둥치는 요즘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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