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중립 LCK 롤팬입니다

중립이지만 업셋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약간은 킅을 응원하면서 4강을 봤는데 보고 나니 제가 잘못 생각한거 같읍니다. 대진운 받고 좀 운도 따라서 올라온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킅은 진짜 정직하게 만난 상대를 다 패고 전승으로 올라온 강팀이었어요.

저는 이 5전제에서 킅이 가장 불리한 부분이 밴픽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라인전 체급 이런거는 밀리는거 상정하고 알아서 할거라고 생각해서 별 문제가 안 됐다고 생각했는데, 5전제 피어리스에서 저 인간미 없어보이는 젠지의 챔프폭을 퍼펙트 덕담 피터가 감당할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지요. 실제로 젠지는 위기에 몰릴때마다 해주는 듀로의 블리츠, 기인의 크산테, 쵸비의 스몰더 같은 픽들을 호주머니에 항상 갖고 있는 팀이니까요.

근데 게임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킅이 밴픽에서 명백히 밀리는 느낌이 난 판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게임 보기 전에는 ‘탑 기량차이가 제일 큰거 같은데 젠지가 미친척하고 퍼펙트 챔프폭을 저격밴 하면 구멍 파서 이기는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퍼펙트는 4세트 내내 자기가 좋아하거나 메타픽을 골라서 활약했어요. 럼자오자레처럼 괴상망측한 밴픽이 나온것도 아닌데.

너무 흥미로워서 머리도 써볼겸 허접하게나마 분석글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인게임을 자세히 볼줄은 몰라서 밴픽 의도 + 양팀이 구상한 게임 각 정도만 뇌피셜로 쓰겠읍니다.

1세트


저는 5전제의 1세트 밴픽은 두 팀이 준비한대로 이루어지는 유일한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세트들은 1세트 결과에 따라 바뀌는거고요. 그런 점에서 첫 밴픽 페이즈는 탐색전 느낌이 강했어요. 대놓고 OP인 오리 아지르 하나씩 밴하고, 젠지가 유나라를 밴해서 ‘우리가 오공 짜오 둘 중 남는거 가져간다?’를 시전해서 둘 다 밴. 킅의 막밴 갈리오는 ‘우리 대승민 잘하는 럼블 줄거임’ 이죠. 그래서 좋은 픽들이 많이 열렸고, 젠지는 미드 무력을 믿는듯 1티어인 탈리야 선픽, 킅은 이번 대회 최고급 서폿인 니코를 가져갑니다.

3픽 코르키는 누굴 상대로도 무난무난한 픽인데, 자르반을 고르기엔 탈리야 템 뜰때까지 딜이 부족하다고 판단해서 바이를 뽑은거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나중에 나온) 사이온이랑 같이 들이받기에 더 좋은 판테온 같은 픽은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KT의 요네 픽은 까딱 AP미드를 했다간 자르반 키아나 같은게 밴 당해서 상체 3AP가 강제될수도 있다 생각해서 빨리 올린거 같습니다.

2페이즈 이즈 밴이 처음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보기엔 젠지가 기인한테 사이온을 주기 싫었던거 같습니다. 사이온은 당연히 1티어 픽이지만 최강의 폼을 자랑하는 김기인씨가 잡기에는 챔프 자체가 좀 멍청하니까요. 그래서 원딜 하는거 보고 생각하려고 했는데 킅이 원딜픽을 막픽으로 남겨서 과감한 암베사 픽은 아껴두고 사이온으로 선회, 킅은 다른 궁극기랑 시너지도 잘 나는 자르반, 그리고 막픽 케틀로 밸류를 챙깁니다.

결과적으로 젠지는 바텀-정글이 초반을, 현 메타 최고의 탱커인 사이온이 중반을, 탈리야가 3코어 이상을 책임져주는 밸런스 잡힌 조합을 뽑았습니다. KT는 앞라인이 부실한 대신 럼블-자르반-니코-요네의 막강한 궁밸류로 싸움각을 보는 조합을 뽑았고, 양쪽 다 할 말이 있는 밴픽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경기 내에서도 양쪽 다 원하는 구도가 한번씩 나왔고요. 하지만 젠지가 게임을 제때 굳히지 못하면서 (그리고 여기엔 한타마다 궁 활용을 잘했던 KT 선수들의 공도 있고요) 후반 케이틀린의 미친 캐리력이 발휘되면서 킅이 1세트를 가져갑니다.

2세트


2세트 젠지는 퍼펙트의 레넥톤을 밴하고, 트런들이 밴 된걸 기반으로 짜오-갈리오 조합을 완성합니다. 킅은 AD정글 힘을 맞추기 위해 키아나+비디디가 자신있어하는 라이즈, 그리고 젠지는 그 라이즈를 억제하기 위해+앞라인으로 갈리오를 픽합니다. 3픽으로 알리가 나왔는데, 게임 내내 제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베사-짜오가 들이박는걸 저지하려고 나온거 같읍니다.

젠지는 또 앞라인 때리기 좋아하는 시비르 밴, 앞라인 설 수 있는 크산테 밴. 기인의 암베사를 그웬 같은 칼챔으로 막기는 버겁다 판단해서 렉사이 픽, 그리고 킅의 앞라인이 부실하다 생각한 젠지가 이즈 노틸로 마무리를 합니다. 킅은 사실 상대 조합 생각하면 별로 맛 없지만 남은 픽이 별로 없어서 포킹 싸움을 위해 바루스를 픽합니다.

킅은 바루스가 살기는 힘들지만 포킹바루스 특성상 스킬을 다 들이붓고 죽으면 생존력 좋은 라이즈-렉사이가 마무리 한다는 생각이고, 젠지는 앞라인 탱킹력의 우월함을 이용해 노틸로 한점돌파를 한다는 구상이었던거 같습니다. 본게임에선 양팀 다 사고를 거하게 한번씩 쳤는데 하필 이즈가 킬을 주워먹는 바람에 알리가 하루종일 샌드백이 돼서 힘을 못 쓰고 젠지가 승리합니다. 솔직히 이 조합으로 이즈한테 초반에 킬 퍼줬으면 지는 게 맞습니다.

3세트


쵸비 비디디 둘 다 아지르 오리아나를 잘하는 선수라서 한번쯤은 둘 다 열려서 나눠먹는 구도가 나올거라고 생각했고, 여기서 그렇게 됩니다. KT가 오로라, 카이사를 밴하면서 “나눠먹기 싫으면 너네가 둘 다 밴하셈”을 시전, 젠지는 ‘우리가 왜?’ 라면서 유나라를 밴합니다. 킅은 앞라인이 싫어하는 트런들을 밴하고, 젠지가 미드 자존심 싸움에 응하면서 오리-아지르가 둘 다 열렸고 비디디가 아지르를 칼픽합니다.

여기서 제가 생각하기에 젠지 최대의 패착이 나오는데, 트런들이 밴돼서 크산테 티어가 엄청 올라갔단 말이죠. 기인의 크산테는 8강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상성이고 뭐고 무시하는 그냥 사기급입니다. 퍼펙트가 아예 못하는 챔프도 아니고요. 근데 그걸 안 뽑고 정글을 선픽합니다. 크산테가 아지르에게 비교적 약한 게 있긴 한데 언제는 젠지가 그런거 신경썼나요? 킅은 이게 웬 떡이야 하고 크산테-뽀삐로 태산같은 앞라인을 세우고는 듀로가 잘 하는 이상한 짓 하는 서폿 저격밴, 젠지는 시비르가 껄끄러워하는 원딜 둘을 밴합니다.

여기서 킅 2페이즈 픽이 아주 기깔난데, 애쉬는 라인전은 세지만 캐리력은 별로인 원딜이죠. 하지만 얘는 원딜 중 유틸성이 최고급입니다. 아지르 버스 타겠다는거에요. 룰루도 애쉬 캐리력 올리려고 나온게 아니죠. 상대 빵테온이 공 달고 들어오면 아지르 한번 살려주겠다는거죠. 젠지는 서폿이 밴 된게 너무 많아서 레오나가 나오긴 했는데 뽀삐 상대로 돌진챔프라서 별로 맛은 없습니다.


보시면 킅이 계속 원딜 픽을 밑으로 내립니다. 라인 특성상 상대 원딜을 카운터치는 느낌은 아니고, 사실 소위 말하는 짬처리용입니다. 좋은 픽이 많이 있는 1-3세트동안 “위에서 좋은거 뽑아야 되니까 너는 남는 거 알아서 해”인데, 덕담이 이번 월즈 내내 이 역할을 아주 기깔나게 합니다. 후반캐리 필요하면 케틀, 맛있는 픽 없을때 1인분 해야하면 바루스, 메인캐리 보좌해야 될 때는 애쉬. 그냥 육각형이에요. 이게 일견 좁아보였던 퍼펙트의 챔프폭을 5전제 내내 보완해주는 하나의 원동력이 된거죠.


솔직히 비디디가 아지르를 잘하는줄은 다 알았지만 쵸비를 상대로 이정도로 해낼 줄은 아무도 몰랐겠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왕 할거면 젠지가 아지르를 잡는 도박을 하는게 맞았죠. 그렇게 하려면 젠지가 블루에서 오리-아지르를 열었어야 했고. KT는 조합 특성을 살려서 큰 실점 한번 없이 젠지를 박살냅니다.

4세트


피어리스 4세트 부터는 슬슬 이상한 픽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거에 한번 호되게 데인적 있는 젠지가 KT의 필승 포킹조합을 밴하고, KT도 니달리를 밴해서 소소한 웃음을 줍니다. 젠지는 남은 정글 중 티어가 비교적 높다 생각한 스카너를 가져왔는데, KT가 기다렸다는듯이 8강부터 급부상해 3전 전승을 기록중인 문도를 픽하고, 바텀에 챔프풀이 줄었으니까 칼리스타로 강하게 잡아줍니다. 여기서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루나미를 예상했는데 젠지는 더 안정적인 루브라를 픽했고, KT는 바텀 주도권을 위해 레나타를 픽합니다.

양쪽 다 무난한 미드 탑을 밴하고, KT가 카시 선픽이라는 강수를 둡니다. 저는 이 픽이 대단했다고 보는게, 카시는 이번 대회 티어가 높지만 챔프 디자인 특성상 장단점이 뚜렷한 픽이에요. 근데 상대 에이스인 탑 미드 픽이 안 나왔는데도 선픽을 했다? “3세트 해보니까 니네가 뭘 해도 상대할 수 있겠다”라는 비디디의 자신감이죠.

기인은 요릭을 픽하는데, 여기서 모데는 어땠을까 생각해보면 아쉽긴 합니다. 둘 다 라인전 세고 지 할거 하는 챔프인데, 상대에게 뭔가를 강제하는 건 모데가 더 좋고, 이번 월즈 모데가 나와서 1인분 못한 게임이 있긴 있던가요? 칼리스타에 카운터를 세게 맞는다 생각해서 안 나온거 같기도 하고요.

애니비아 픽은 여러 생각이 드네요. 조합적으로는 할 말이 분명히 있는 픽이에요. KT 조합에 뚜벅이 비중이 높고, 칼리스타는 안 그럴거 같지만 슬로우에 엄청나게 취약한 픽입니다. 근데 이게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게임에서 그 중요하다는 미드가 “해 줄 수 있는” 픽인가? 챔프 자체가 수동적이고, 결국엔 쵸비의 승리공식인 “잘 커서 이기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픽이란 말이죠.

결국 게임은 KT의 승리공식대로, 라인전에서 좀 헤메다가 한타에서 이긴다는 단순무식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커즈와 봇듀오는 주도권을 잡고 오브젝트를 계속 가져가면서 한타를 강제했고요.



총평


럼자오자레 때도 그랬지만, 젠지가 뭔가 엄청나게 비상식적인 블런더를 범한 적은 없어요. 오히려 스위스 때에 비하면 굉장히 정석적이고 일리있는 밴픽을 했어요. 그런데 그것뿐이었어요. 앞라인 잡고, 초중반에 센 정글 넣고, 원딜이나 미드에 캐리롤 넣고, 상황 봐서 서폿에 유틸이나 앞라인 넣기. 일견 이상해 보이는 애니비아 픽도 분명히 상대 챔프 보면 할 말이 많은 픽이에요.

근데 킅은 어땠나요? 상대 탑이 라인전 무자비하기로 유명한 김기인? 그럼 탑에 무조건 좋은거 넣어줘. 라인전 약열세로 져도 한타에서 활약하면 돼. 미드? 우리 미드 지금  세체미 수준이니까 주도적으로 할 거 있는 캐리롤 주면 돼. 서폿은 1, 2세트 보니까 앞라인은 별로고 유틸폿 주자. 원딜은 대회 내내 남는 픽 주는걸 아무거나 잘하네? 그럼 구태여 빨리 픽할거 없이 내려서 상체 체급 높이자. 의도가 분명하잖아요. 상대적으로 우리가 어디가 약하고 어디가 강한지를 판단해서 약한쪽을 보완하는 전략. 이게 사실 밴픽의 원천적인 목표 아니겠습니까.

젠지가 더 유동적인 밴픽을 하고 싶었다면 2, 3세트 이후 미드의 상대적 열세를 인정하고, 라인전은 불안정할지라도 룰러의 살아있는 캐리력을 최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보좌했을 수도 있지만, 무난무난한 밸런스를 중시한 나머지 루브라라는 어중간한 듀오가 라인전 주도권을 한 번도 얻지 못했습니다. 김기인씨는 명불허전이라 라인전에선 지는 챔프로도 리드를 했는데, 원래 데뷔때부터 김기인씨 특기는 라인전 센걸로 상대 탑 팔다리를 분지르는 안티캐리 롤이었어요. ‘기인은 라인전 지는거 해도 1인분 하니까 아무거나 주자’가 아니고 ‘기인이 상대 탑이 사람구실을 못하게 강한걸 주자’ 같은거였으면 달랐을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젠지는 멘탈관리 잘 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T1의 승리를 기원하고, 결승에서 통신사 더비로 누가 이기든 명경기가 나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