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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5/07/31 22:00:58 |
| Name | 골든햄스 |
| Subject | 돈과 아파트와 첨밀밀과 인스타 공개설정과 법철학 사이에. 혹은 그 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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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나는 스스로를 식물과 같다 생각했다. 돈이 없어 입욕제나 여타 비누가루도 풀지 못한 투명한 물 뿐인 욕조에 몸을 담근 채 멍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스스로의 존재를 체감할 수가 없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00년대의 가정폭력 피해자는 한국 사회에서 모두가 보고도 모른 척하는, 지우개 가루 정도의 가치도 지니지 못하는 급격한 경제발전과 재조정의 사소한 부작용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차라리 자비로운 누가 나를 죽여주었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나는 무른 아버지의 학대 속에서 죽지도 않고 반 죽음과 삶 사이를 끝없이 방황했다. 이름도, 현상도 없이, 특별히 욕하는 이도, 칭찬하는 이도, 연민하는 이도 없이. 그저 해충을 막듯이 다들 날 보면 투명한 방어막을 쳤다. 우리가 어떤 이를 방관하고 있다는 죄책감만 외면할 정도의 작은 비현실감을 그곳에 구현한 것이다. 나는 웃으며 말을 걸어도, 모두가 이야기하는 최신 유행 노래에 대해 말을 얹어도 묘하게 무시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곳에서 하나같이 그렇게 행동했단 사실이, 나는 지금도 몹시 놀랐다. 우리는 때로 약속한 것처럼 행동한다. 그럼에도 살고 싶었다. 보다 정확히는, 나를 버리고 짓밟고 비웃는 세상의 어른들과는 다른 어른으로 자라내고 마겠다는 오기에 가까운 각오가 내게는 있었다. 매일 같이 그것을 속으로 되뇌일 때마다 혈관이 노래라도 부른 걸까. 아버지의 이유없는 폭행과 지능적 혐오, 정신 조종 사이에서 길을 잃어서일까. 나는 하이얗게 자라났다. 세상에 대해 아는 건 글자뿐. 빤히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아무 생각이 없을 때도 많았다. 멍하게 공격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최소한의 전제 하에 남들을 따라 화장품 가게를 들어갔다 돈이 없다고 무시를 당하면서도, 처음에는 친구가 끌고 나와주기 전까진 내가 무시를 당하고 있단 사실조차 몰랐다. 백치처럼 세상을 걸어 나왔다. 손 안에 남아있는 건 욕조에서 손가락이 쭈글쭈글해질 정도로 보냈던 하얀 공백의 시간들, 그리고 약속. ‘반드시 나 같은 어린 아이를 구하는 사람이 될 꺼야.’ 처음에는 자극적인 인터넷 여론도 좇아봤다. 희한한 공격성들의 뿌리를 알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사람들에게 서로 친절하게 대하자고 말하다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그외에도 인터넷에는 배울 게 많았다. 진상. 맘충. 김치녀. 이 세상의 모든 쓰레기 같은 것들(혹은 그렇게 상상한 것이라도)에 대해 사람들이 홧김에 버튼을 눌러 버린 부정적 감정이 잔뜩 쌓인 산더미. 그렇다. 인터넷은 거대한 쓰레기 산이었다. 그곳에서 계속 “지하철 타는 법”, “화장품 사는 법” 등을 검색하고 지나가는 이들에게 삶의 방법을 구걸했다. 작은 애정이 고파 서로 자극적인 글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쓰는 이들이, 간혹 신새벽 서로에게 사랑을 이야기한단 걸 사람들은 믿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서로 친절히 말하자고 주장한 내 말에 따라 생겨난 인터넷 익명 사이트 중 (아마) 가장 친절할 작은 공간이 남몰래 다음 카페 한구석에 존재한다는 것도. 그게 내 인터넷 투쟁 역사의 결실이라면 결실이었다. 혹시 가끔 가난이, 병마가 쫓아와 힘들면 쓰라고 음식 기프티콘과 복지 정보를 나눠놓은 글이 공지사항인 새까만 사이트. 그럼에도 더 용기를, 매일 조그만 용기를 더 냈다. 잘은 모르겠지만 국회와 관련된 곳에 가면 좋을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들 모두 불행한데, 알리고 싶었다. 철없이 정치적 성향을 정하고 국회의원을 후원하기도 했다. 담론에 휘말려 논객들을 추종하다가, 현실을 깨닫기도 했다. 그 사이 어릴 때 나의 불우한 집안의 친구들은 성폭행을 당하고, 그러고도 또 낯선 친구들이 나오는 게임 모임을 나가고, 아르바이트에서 왠지 모르게 진급을 거부하고, 서브웨이로 새로 취직했다. 혹은 전혀 대화가 되지 않는 단단한 껍질 안으로 숨어든듯 바뀌기도 했다. 말끝마다 엄마의 부동산 투자법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하는 친구는 고추장에 밥을 비벼먹었다. 늘 녹슨 오래된 집들을 옮겨다니고 몸이 항상 어딘가 이유없이 아프며 알 수 없는 봉침을 놓는 등의 이름 모를 치유가들을 찾아다니는 그 집안의 아이는, 내가 힘들게 세상의 벽을 오를 때, 넘어질 때, 다시 일어날 때, 그 모든 순간을 못 본 척했다. 나는 그들과 점점 멀어졌지만, 부유한 중산층 아이들 사이에서는 또 고립되었다. 이상하게 그들은 나를 죄책감없이 “소모”했다. 과제를 써달라 하고, 나의 생일은 넘어갔다. 같이 웃고 떠들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그래도 분명히 우리 사이에는 선이 있었던 것일까? 대학이란 한바탕 놀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던 연극부의 부원들이기라도 했던 걸까. 가끔 “누나. 지독하게 착하지.” 이런 식의 기이한 말실수를 하는 아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나에 대해 직접적 평가를 해주거나 인생의 진로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난하면 공부를 하라는 건 이데올로기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이유 있게 가난하다고 말하기 위해서라도 남아있어야 하는 명제였고, 가난하고, 맞으며 공부하는 나는 그렇기에 모두가 ‘안 될 걸’ 알면서도 말릴 수 없는 누군가였다. 그리고 어떻게든 지독하게 그들과 비슷한 성적을 낼 정도로, 가끔은 질투를 살 정도로 학문적 재능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적 교류가 그곳에는 없었다. 숨쉬는 게 힘들어졌다. 사람들과 밥을 먹으면 산처럼 배가 부풀었다. 매일 두세시간은 뜨거운 물로 몸을 지졌지만, 이상하게도 그 현상은 낫지 않았고 곧 허리와 목의 심각한 통증, 알 수 없는 온몸의 전기가 통하는 듯한 고통 등으로 번져갔다.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걸 가지지 않고도 알지 못했다. 가져본 적이 없기에. 그냥 사람들에게 가끔 ‘의지력, 생존력 면에서 최고다’ 같은 말을 들으면서도 알 수 없는 침묵과 고요 속에 그렇게 학교를 다녔다. 병이 심해지자 아버지는 날 못 본 체했다. 이제는 아버지 앞에서조차 나는 침묵이 되었다. 나는 작은 음표라도 되고 싶어 남자친구의 집으로 탈출했다. 길고 긴 울음과 분노와 터져나오는 트라우마, 공격성, 자본주의의 하얀 정육면체 공간들에선 허용되지 않은 채 물밑에 있던 모든 물귀신들이 수면 위로 나와 서로를 갉아먹었다. 서로를 공격했다가 사랑하기를 반복했고 펑펑 울며 새벽을 보냈다. 통증이 너무 심할 때 우리는 인간극장을 찍는 척을 했다. 나는 우주에 사는 한 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냈다. 계란 노른자 안에 자고 싶어 들어갔다가, 그 계란의 소유자인 인간이 계란을 요리하려고 깨트리자 “왜 잠을 깨우는 거냐!” 하고 화를 낼 정도로 뻔뻔하고 순수한 성격의 어떤 종족에 대하여. 우리는 그 이야기에 푹 빠져서 한마리씩 등장 인물을 늘려가고, 관계도를 지으며 그 고통의 세월을 버텼다. 가끔 통증이 너무 심하면 1분이 1시간 같았다. 온몸을 바늘이 찌르고 중국식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만 내색 안 하고 애인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로스쿨에서 내가 뭔가 남들과 다르고, 이상하고, 부족하다는 게 점점 분명해졌다. 동시에 한국에서 그것에 대해 직언을 듣거나 제대로 도와줄 상담사를 찾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단 것도 밝혀졌다. 날 열심히 심리상담해주다가 대한민국에 심리상담을 처음으로 들여온 사람 중 하나라는 아버지의 인맥에 힘입어 작은 대학의 심리학 교수가 된 한때는 꽤 친했던 여성 상담사 분은, “교수가 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라 했다. 그리고 내가 계속해서 내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다, 이해를 못 받는 게 답답해서 그래프까지 그려 인생에 대해 다시 설명하자 “그래서?” 라고 물었다. 로스쿨 상담사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휴학 상담을 위해 반드시 면담해야하는 변호사는 내가 혹시 도와줄 수 있냐고 보낸 메일을 읽고 무시했다. 홧김에 대학 총장 등 온갖 유명인에게 보낸 메일들도 무시당했다. 인터넷에서 배운 것과 현실은 달랐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분당은 경기도가 아니지. 따로 봐야지.”라면서 깔깔 웃었고, 성적이나 외모로 사람을 갈랐고, 미리 직업적 카르텔을 형성하자고 말하곤 했다. 서로가 서로의 장래에 도움이 될지 날카로운 눈으로 지켜봤으며, 모두가 최소한 안정적 교수 이상인 부모를 갖고 있었는데 그들은 의문의 자산이 많았다. 분노에 찬 인권 교육에서 강사는 알콜 찐따 같은 표현이 학교 안에서 인권을 해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말없이 침묵을 지키며 그 교육을 이수했다. 나는 내 인권부터 구해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인권법 교수가 그 대학원에서 옷도 제일 화려하고 돈도 많아보였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 정치적 레즈비언들, 타고난 어떤 운명을 못 벗어나는 여자들 따위가 인권법 학회에 가득했다. 그중 발작하듯 뒤에서 우울이 터진다는, 앞에선 절대 티내지 않고 싱글싱글 웃는 여학생 하나가 인권법 여자 교수를 입에 침이 마르게 찬양했다. 다른 남학생은 자기는 그 사람이 그정도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절대 인권법 수업에 들어가지 않기로 속으로 다짐했다. 온갖 복지서비스를 받으려 할 때마다 수십 가지의 서류를 요구받았는데, 소득이 0원이나 자산이 0원인 경우를 기관이 미리 생각을 못해놔서 더 복잡하게 따로 서류를 떼야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랑 같은 지역에 살면 당연히 부모의 지원을 받을 거라 생각하고 주거복지를 최하위로 하기도 했다. 난생 처음 들어본 온갖 서류를 준비해서 겨우 통과한 복지를 통해 얻어낸 청년전세 집에서 나는 너무 기뻤지만, 내 대학 과 동기는 찾아와 갑자기 ‘아아’ 같은 표정으로 집을 둘러보더니 얼른 옆의 빵집으로 가 롤케익을 사와 내게 줬다.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나는 이 집의 세모난 벽이, 조금 낭비된 그 공간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는데. 하늘색 문도 너무 마음에 드는데. 누군가는 내 원룸의 꽃 벽지를 욕했다. 근데. 가난할 때는 그 벽지의 꽃이 정말 위안이었다. 경찰은 당연한 것처럼 나의 아버지에 대한 정보공개청구를 아무 답 없이 무시했다. 울면서 아버지에 대해 쓰는 나와 나를 토닥여주는 대학 후배를, 나이든 경찰은 경멸하는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메일함을 아무리 확인해도 정보공개청구는 깨끗이 무시된 채였다. 아버지가, 큰아버지가 미쳐서 쫓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호신용품을 샀다. 가끔 남자친구와 헤어지거나, 내 무거운 사연을 알게 되면 귀신 같이 접근하는 남자들이 있었다. 성적인 뉘앙스를 풍기거나 자기가 개인 상담을 해주겠다고 하거나 운동하는 데 쫓아오거나. 그럼 나는 한 번도 그냥 지지 않았다. 소리를 지르고 도와달라 하고 우짖었다. 나는 여기서 죽지 않을 꺼야!!!!!!!!!!!! 내 대학 지도교수님이 움직였다. 평생 법철학을 연구한 고매한 학자셨다. 나에게 장학금을 주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온 학교에 메일을 보냈다. 다리가 아파 움직이기도 힘든 채 학문에 매진하던 분이라 그런지, 메일이 고즈넉하고 옛 문체였다며 서울대 대학원 교수가 웃었다. 가난해보여서 무시를 많이 당했겠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차라리 솔직하고 사회성 없는 거로 유명한 그 교수가 고마웠다. 나를 무시했던 대학원 조별 지도교수의 부친상이 있던 날. 나는 장례식장을 찾아가 절을 했다. 아이들은 공식적으로 조장이 가거나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나는 사람이 죽었는데 지금 그게 무슨 말이냐고 했다. 장례식장은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나는 남자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경험을 바탕으로, 달콤한 과자들을 건넸다. 장례식장에서 그런 것이 귀중해질 때가 온단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일로 방문이 감사했고 과자도 잘 먹었다는 답신이 왔다. 스승의 날에는 편지를 썼다. 무언가. 무언가 알았던 걸까. 혼신의 힘을 들여 무언가 정상적이고 표준화되고 그러면서도 영혼이 있는 편지를- 교수님이 나를 불렀다. 내 얘기를 듣더니 자기 학교 때 연탄 나르던 애가 있었다고 했다. 공부를 돕겠다고 했다. 결말만 말하자면, 우리는 이상하게 친해졌다. 근로장학생을 하는데 부당한 일을 당했다. 교직원들이 일을 추가시키며 이상하게 나를 빙 둘러싸고 지켜보기도 했고, 학생들이 멋대로 방을 사유화한 뒤 공지에 나중에 그걸 추가하기도 했다. 같이 근로장학생을 하던 여학생 하나가 학생회 아이들에게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서 내 인생에 반복되던 이 패턴이, 억울한 일이 맞구나, 비로소 실감을 했다. 나는 그냥 근로장학생을 그만뒀다. 공부가 되지 않았다. 법이 다 거짓말 같았다. 그럴 때 조영래 변호사의 유고집을 꺼내 읽었다. 우리가 인간성에 거는 모든 기대는 어떻게 될 것이란 말인가. 그 문장이 좋았다. 사회에 조금 더 참여하고 싶어 나간 정의당에서 처음으로 받은 질문은 어디 사냐는 것, “자가냐 월세냐”는 것. 그날 집으로 돌아와 펑펑 울며 교회 십자가들을 봤다. 세상이 악마의 입동굴 같이 느껴졌고 곳곳에서 죽어가는 소외된 자들이 느껴졌다. 그속에서 그나마 기적 같이 살아남은 내가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아냐. 난 멈추지 않을 거야. 뭐라도 할 거야. 과호흡 속에서 수능공부를 하던 때처럼 발버둥쳤다. 조금씩 한국 사회가 익숙해졌다. 점점 익숙하게 한국의 문법을 배워갔다. 앞에서는 아주 공적으로 깨끗하게. 뒤에서는 아파트 투기와 전문직 만들기. 당도 계속 나갔다. 피켓 시위라도 배울 생각이었다. 뭐라도. 뭐라도 해야 해. 구글로 아동학대에 대해 검색했다. 국회의 보고서 하나가 있었다. 그곳에서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짧게 실려있었다. “현장에는 변호사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 한 줄이 너무 슬퍼 보고서를 바탕화면에 저장해두고도. 공부가 되지 않았다. 전략적으로 나의 마음을 채워줄 인간관계를 만들어갔다. 의도적으로 신앙을 가졌다. 끝없이 심리치료를 시도했다. 점점 몸의 자세가 펴졌고, 남자친구와의 오랜 대인관계의 경험이 쌓여 점점 남들에게 기피되는 어두운 기운이 사라져갔다. 남자친구는 어느새 십수 년은 늙은 거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의 순수한 마음을 지킬 거야.” 그가 말했다. 사람들에 대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오프라인 관계를 늘려갔다. 조금 친하던 친구와 술자리를 갖는데, 직장내괴롭힘이 있지만 자기가 다행히 가해자의 타겟이 아니라 눈감고 있다고 했다. 누가 괴롭힘만 당하면 나서서 온 학교와 싸우던 어린 시절의 내가 생각나서 우습고도 복잡했다. 그 사람은 결국 신고를 했지만 제대로 증거를 잡지 못해 일만 더 안 좋게 꼬였다고 했다. 사원증 모양의 녹음기가 있어야 해. 우리는 그런 농담 해. 나는 하하 웃었다. 남자들을 수십 명 사귀며 성을 탐닉하던 언니도, 자신의 외모를 자랑하면서도 학벌 콤플렉스에 울고 불며 만나면 계속 자기가 춤추는 영상을 보여주며 알 수 없는 인정욕구에 시달리던 친구도, 늘 이기적으로 자기 것을 취하던 친구도 모두가 결혼을 했다. 하나 같이 근사한 스튜디오에서 길게 끌리는 멋진 웨딩 드레스를 입은 채였다. 집안이 안 되는 아이들은 알아서, 연구직을 포기하고, 전문직을 포기하고, 더는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중견 규모 보험사를 다니는 친구는 직장에서 점심 시간마다 동료들과 명품관을 돈다고 했다. “이거 디올이잖아. 언니!!” 순수했던 친구에게서 나온 말은, 그래서 진심이라기보단 잠시 사회생활에 물들어 나온 유행어 같았다. 머리가 보기 좋다 칭찬하자 “이거? 다이슨 에어랩.” 하고 새침하게 대답했다. 그 아이는 남자친구가 에르메스의 마크가 크게 새겨진 목걸이를 강제로 생일선물로 받고 하고 다니라고 강요한 통에 헤어졌다. 나도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같이 유튜브 알고리즘을 공유하고, 아마 비슷하게 나는 솔로의 빌런을 보고 웃고 있을 거지만, 정말 끔찍한 짓도 하고 정당화하는 존재들이고, 그게 ‘보통의 일상’이다. G컵 가슴으로 대기업 남자 만나려는 게 잘못이냐고 술취해 울부짖던 친구는 아직 시집을 못갔지만 세종캠이지만 안암캠인 척하고 친구들을 강남에서 만날 때 고려대 잠바를 일부러 입고 간다던 오빠는 취직도 잘하고 결혼도 잘한 모양이었다. 바람 피고 성매매 하고 몰카 찍고. 그게 우리 사이에 그냥 있는 일들이구나. 모두가 아파트 경마에 집중하고 있으면서 행사에서 마이크를 쥐면 공정사회 따위를 말하고. 유튜브로는 종종 감성 있게 옛날 영화 첨밀밀 ost 같은 걸 듣다가. 단톡에서 정치질을 하다가. “언니. 그때 왜 나한테 ‘너, 엄마 없지?’라고 말했어?” 내 댓글 하나에 아는 언니의 인스타는 비공개로 전환됐다. 이 시츄에이션을 들은 내 정신과 주치의는 폭소했다. 그냥 웃긴 일이라는 식이었다. “반성은 안 하고, 그날 기분 좀 나쁘다 정도로 생각하겠죠.” 사람들의 도덕 수준은 너무 알기 어려웠다. 어릴 때 나는 지각 한번만 해도 편부가정이라 유세 부리냐고 담임 선생님에게 쥐잡히듯 혼났는데. 아파트 투기는 전혀 나쁜 일이 아니었다. 대형 로펌 컨펌을 두고 정치적 싸움을 벌이고, 서울대 익명 사이트에서 댓글로 서로를 견제하는 건 나쁜 일이 아니었는데 나처럼 어둡고 음침한 건 죄였다. 어떤 때 아동학대를 신고 안 한 건 죄가 아니었는데 어떤 때는 죄였다가 또 어떤 때는 유별났다. 그래도 기준이 있었다. “우리”와 “저들”이었다. 오멜라스의 버려진 아이 주제, “우리들” 사이로 들어가보고 싶었다. 남자친구의 손을 잡고, 말투를 연습하고, 사회참여회로에 대한 논문을 읽으며 점점 일어섰다.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사람들의 단점 하나는 무조건 수용하자고 생각했다. 이미 그 어떤 정당에서도 문제시하지 않는 사각지대에 빠졌다가 나온 나는, 어떤 정치성향의 사람 앞에서건 그들의 말을 맞춰줄 수 있었다. 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실은 모두가 비슷하니까. 신기하게도 그간 날 도와준 사람들은 하나같이 신의 존재를 말했다.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너를 도와야 할 거 같아. “신의 힘으로” 여기에 올 수 있었어. 혹시 알아요? “누가 저 위에서” 지켜보고 있을지. 그들이 그려낸 신의 그림, 그리고 그 그림을 통과했기에 허기와 목마름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나. 아, 신은 존재한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믿어온 나의 신. 내가 올바르고 떳떳하게 산다면 설마 세상이 나를 죽이진 않을 거라 믿어온 나의 어떤 믿음. 넷플릭스를 재밌게 보고 같이 밈에 깔깔거리다 등에 칼을 꽂는 소송을 할 수도, 불륜을 할 수도 있는 우리들. 누군가의 목숨은 숫자고 누군가의 목숨은 운명인 우리들. 저마다의 슬픔을 갖고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들. 누구라도 자랑할 선행은 하나는 있는. 각자의 가치관과 정의관. 어느새 분리되어가는 ‘앰생’을 사는 이들의 정신적 고통. 그들 중 일부가 마약을 찾는 게 십분 이해가 되던 나의 어려운 시절의 그 놀라운 정신적 충격과 분열이 주던 잊을 수 없는 느낌들. 일분마다 감정이 바뀌며 폭주했던 날 두고 무서워하면서도 날 지켜주던 남자친구와 그 겨울의 영종도. 학원 강사도 배운 사람들이라며 동경하는 사람들과 법률가 등을 ‘몽키’라며 일 시키는 원숭이라고 표현하는 상류층들. 거액의 돈과 작은 강아지. 우리들. 우리 인간들. 사랑하고 싶은, 우리들. 그럼에도 못내 사랑스럽고 어떻게든, 어떻게든 용서하고 싶은 사람들. 같이 살아가야 하는 우리네 사람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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