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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4/12/08 06:44:08
Name   소요
Subject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난 다시 만난 세계,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노래
1. 탄핵 무산에 대한 즉각적인 감정

지구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시간이 반대로 흘러가요.

새벽까지 버티다가, 중간에 잠깐 졸았다가, 이른 아침에 깨서 불투표로 탄핵이 무산되는 걸 보고, 다시 잠을 청했다가, 이제야 일어나서 도서관에 왔어요.

어제 새벽부터 잠을 자고 일어나도 계속해서 반사적으로 드는 생각은

국민의힘 의원 한 10명 길거리에서 찢어죽이면 되지 않을까?고요.

그리고 이건 좀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분노의 크기야 그럴 수 있다 싶지만, 너무 커지면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할 가능성이 높은데 지금이 딱 그런 상태 같거든요.

저와 비슷한 수준의 분노를 느끼는 분들이 많을 듯해서 할일은 제쳐두고 잠시 아무렇게나 타닥타닥 해봅니다.

2. 불안감을 짚어보기 - 자괴감 그리고 분열에 대한 공포

살면서 집회는 허다하게 나갔어요. 나라의 큰 일들도 큰 일이고, 서울 산책 나갈 때면 종종 광화문에 들러 사전에 몰랐던 집회나 기억공간에 들르고는 했어요. 운동권이라 정체화 할 정도는 아니여요. 왼쪽에 더 동의하지만 회색분자에 가깝지요. 그럼에도 큰 집회가 열릴 때면, 처음 나온 지인들을 가이드할 정도로 경험이 쌓이기는 했었어요.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그나마 그게 회색분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 느꼈어요. 문화/정치/경제적 극우를 제외한 대부분의 정치적 스펙트럼에 - 이를테면 노동자연대부터 개혁신당까지 (과거 민정당계 일부까지) - 어느 정도 동의하고 어느 정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체현적인 활동이 필수불가결하다 느끼는 입장이기에, [어쨌거나 의제에 동의한다면 개인적으로 참여한다]가 되었지요.

그랬던지라 이번에는 멀리서 응원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에 자괴감이 많이 들었어요. 주변 사람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고, 참여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그러는 걸로는 무력감이 가시지 않더라고요. 이 작은 공간에서 분노가 서로를 향할 때 완장질 하는 건 제 주제에 맞지 않는 일이라, 하고 나면 또 괜히 씁쓸하고요.

많은 분들이 전망하시듯이, 오늘 탄핵을 막았어도 국민의 힘과 윤가가 출구를 찾기란 쉽지 않다 생각해요. 이 정도로 분노하고 결집한 일반의지를 기존에 써먹던 살라미 전술과 갈라치기로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그걸 머리로는 아는데도,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네요. 그리고 그 혹시나 하는 불안감의 근원은 우리가 지닌 커다란 분노의 총구가 서로를 향해 겨누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고요. 이미 우리 사이에는 지역으로, 젠더로, 계층으로 분열이 존재하니까요. 그리고 그 분열을 뒷받침하는 각자의 '팩트'도 있고요.

그런 분열의 가능성에 대한 작은 이야기를 해보자면.

3. 임을 위한 행진곡과 다시 만난 세계의 조우

https://theqoo.net/hot/3519337096 '내 아버지의 표는 내 표로 상쇄될 것이다'

https://theqoo.net/hot/3519334809 '오늘 시위에 나온 남성들 : 정리해드림'

제 과거의 경험 중 하나는 여성들의 낮은 집회 참여였어요. 제가 목격했던 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은 남성이었거든요. 뭐 그 또한 정치가 여성들을 배제하여 왔기에 생겨난 결과이지만, 저는 그 외에도 물리적 폭력에 대한 공포, 사적이고 친밀한 영역에 대한 집중 등 단순 '가부장제'로는 환원되지 않을 여러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들끓는 여초 사이트 분위기를 보면서도 회의적인 마음이 컸었어요. 저래놓고 그냥 말로 그치겠지 하는 마음이요. 아내에게도 저 중 몇 %나 나올지 모르겠다 했고요. 안 그래도 동생이 계엄령 때 국회 나가다가 여자친구랑 크게 싸왔다는 얘기를 듣고, 역시 사적인 세계에 대한 위험을 감수하지 못하는구나 손쉽게 실망했고요.

그런데 오늘 보니까 10-30 여성들의 집회 참여가 젋은 남성들의 그것을 압도한 것 같더라고요. 저와 제 주변 남성들이 더 이상 젋은이가 아니라는 사실 ㅠㅠ은 차치하고, 세상은 언제나 변하고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어요. 지난 10년 간 페미니즘 - 사회에서 이용되는 그 모호한 쓰임새와 별개로 - 운동이 여성 대부분의 정치주체화에 끼친 영향이 여기까지 왔을까? 싶었고요. 유명인에 대한 사상 검증 시도나, 여전히 열심히 '이대남' 패시는 것은 아쉽더라도, 어제 현세대 젋은 여성 분들께서 보여준 정치주체로서의 모습은 정말 멋지고 놀라웠어요. 이 모든 것들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생각도 하지만요.

그렇게 다시 만난 세계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났어요.

https://x.com/ddami1124/status/1865371751297028240?s=46&t=dlaDsVLfCkK8JBFuR-EJ-A

4. 그리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노래

위 얘기를 하는데 현세대 젋은 남성의 상대적으로 적은 참여를 미리 언급하지 않으면 댓망진창 될 가능성이 높아요. 원래 뜨거운 주제에, 지금 서로가 마음에 총알을 장전한 상황이니까요. 이후에 2차, 3차 집회에는 다시 참여가 높아질 수도 있는거고, 이렇게 글 쓰는 것조차도 참여한 젋은 남성 분들을 모욕하는 손쉬운 일반화로 빠지거나, 그놈의 지긋지긋한 '이대남' 프레임을 강화하게 될까 걱정되기는 해요. 그래도 우선 하기는 해야겠지요.

리얼미터 여조 결과에 기반하여 볼 때 (https://www.khan.co.kr/article/202412050836001), 20-30 코호트 전체의 탄핵 찬성 여론이 높아요. 그렇기에 어제의 낮은 집회 참여는, 정치주체로서의 활동양상에 무언가 다른 점이 있는 게 아닐까 싶었어요.

항상 생각하는 가설은 코호트 정체성의 큰 부분이, 페미니즘의 광범위한 메세지에 대한 (도덕적 공박이 주가 되는) 반작용과, 그 반작용적 형태에 대한 사회의 비판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에요. '이대남'에 대한 비판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니면서도, 지나친 일반화와 그 비판에 천착해 온 세월들이 결국은 '이대남'으로 포괄되지 않을 코호트 전체에 무력감을 불러일으킨 건 아닐까 고민하고요.

이게 무슨 현 20대 코호트가 상징적 형태의 피해자다 이런 이야기는 아니에요. 아쉬운 건 아쉬운거죠 ㅋ 그럼에도 아쉬워하는 제 마음을 보면서, 이명박 시대 때 '20대의 낮은 투표율이 문제다'라며 개탄했던 선배들과 같은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게 아닐까 싶은 고민이 들어요. 정치주체로서의 각성에는 당연히 시간이 걸리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결국 자신들을 위한 노래를 찾아내는 것까지도 그들의 과업이라 생각해요. 전세계적인 흐름에 빗대어 보자면, 이준석/천하람 등으로 대표되는 세력이 이들을 위한 노래가 될 가능성이 높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정책연구원 등의 보고서에 기반할 때 한국만의 독특성은 존재하고, 이번 계엄 국면도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 낼 하나의 기회가 되리라 생각하거든요.

사촌동생이라도 더 잘 독려해봐야겠습니다.


* 토비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12-2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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