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10/20 22:33:57
Name   사이시옷
Subject   소머리국밥 좋아하세요?
  어렸을 때부터 저는 비염이 무척 심했어요. 정말이지 마신 물이 그대로 코로 나오는 것처럼 줄줄줄 맑은 콧물이 나오곤 했죠. 이비인후과를 가면 코를 뚫어주는 막대기를 한쪽 콧구멍에 두 개씩 꽂곤 했어요. 어른도 막대기 한 개가 코에 들어가면 고통스러워하는데 저는 두 개를 꽂고도 태연히 앉아있을 수 있었죠.

  알러지라는게 사실 치료법이 딱히 있는 건 아니잖아요? 90년대 초반에는 더욱더 그랬겠고요. 알약 5개를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어도, 매일 같이 양쪽 코 합쳐 4개의 막대기를 꽂아도 야속할 만큼 콧물은 줄줄 나왔어요. 코로 숨을 쉰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죠. 그래서 어디선가 비염에 좋다는 치료법이 있다고 하면 부모님은 이것저것 시도하곤 했었죠. 참 많았었는데 생각나는 건 2개밖에 없네요. 한 개는 9번 구운 죽염을 바나나우유 빨대에 넣어 콧구멍 속으로 불어넣는 거였는데요 한 달 동안 눈물 콧물 흘렸으나 효과는 없더라고요. 콧구멍을 절이는 듯한 고통 외엔 남는 게 없었어요. 콧구멍에 소금을 가득 넣고 따가워서 방방 뛰던 제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시던 엄마의 모습도 떠오르긴 하네요.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차에 저를 태우고 어디론가 달려가시더라고요.
“침술로 유명하신 스님이 계시대.”
  침이라는 말에 그대로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바로 얼마 전 9번 구운 죽염의 트라우마가 그대로 남아있는데 침이라니요. 침울한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저에게 아빠는 돌아오는 길에 소머리 국밥을 사주신다고 굳게 약속하셨어요.

  비염으로 막힌 코 사이로 향냄새가 비집고 들어왔어요. 아빠 다리를 하고 앉은 스님의 무릎을 베고 누워 스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미소를 머금은 스님의 표정과 달리 스님의 한쪽 손에 들린 침은 무시무시했어요. 스웨터 짤 때 쓰는 큰 바늘과 같은 사이즈더군요.

“아프겠지만 조금만 참아. 알겠지?”

  대침을 든 스님의 손이 가까워지자 두 눈을 질끈 감았죠. 침이 코 안쪽 연골에 닿는 것이 느껴졌어요. 그리곤 순간 침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연골을 뚫고 들어왔어요. 코 안에 불이 붙더군요.  너무나 큰 고통에 으앙 하고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그전에 다른 쪽 연골도 우두득 소리와 함께 뚫려버렸지요. 어떻게 하나요. 울어야죠 그냥.

  묵묵히 바라보고 계시던 아빠는 지갑에서 만 원을 꺼내 시주 상자에 넣고 스님께 정중히 인사를 드린 후 제 손을 잡고 밖으로 나오셨어요. 훌쩍이는 저에게 처음엔 피가 검붉지만 점점 피의 색이 선명한 빨간색이 되면 비염이 좋아질 것이라고 하시면서요. 그리곤 암자 옆 소각장 불길 속에 제 코피가 묻어 있는 휴지를 던져주셨어요. 그러면 마음이 홀가분해지더군요. 이제 남은 건 맛있는 소머리국밥 뿐이니까요.

  지난주 자주 가는 호흡기 내과에 가서 진료 예약을 하고 옆에 있는 소머리국밥집에 갔어요. 후후 불며 소머리 국밥을 먹다 보니 그때 생각이 나더군요. 물론 침 맞는 것도 두 계절이 지나기 전에 끝나버렸지만 갈 때마다 아들을 달래려 ‘소머리국밥에 공기밥 추가’를 외치시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라요. 그래서인지 전 소머리국밥이 무척 좋아요.



12
  • 역시 모범 소머리생.
  • 나도 수필 잘 쓰고 싶다ㅠ
  • 으...... 글만 읽어도 끔찍 ㅠㅠ
  • 역시 국밥이 최곱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831 창작[26주차] 순간에서 영원까지 14 에밀리 16/05/18 4925 0
8519 일상/생각추억의 혼인 서약서 10 메존일각 18/11/14 4923 9
7925 일상/생각인터넷 커뮤에서의 여러 논쟁에 대한 생각 10 벤쟈민 18/07/23 4923 14
6209 일상/생각너는 내가 아니고, 나는 네가 아니다 2 염깨비 17/09/01 4923 1
3915 역사러일전쟁 - 뤼순항, 마카로프 6 눈시 16/10/15 4923 6
2636 일상/생각차별과 진보정치 10 nickyo 16/04/18 4923 4
11260 창작그 바다를 함께 보고 싶었어 Caprice 20/12/22 4922 6
4145 정치11월 26일이 기다려집니다 19 Raute 16/11/12 4922 0
3136 일상/생각어느날의 질문 52 ORIFixation 16/06/27 4922 0
3193 기타[불판] 이슈가 모이는 홍차넷 찻집 23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6/07/05 4921 0
2444 방송/연예[프로듀스101] 직캠조회수 연습생 탑 11위 1 Leeka 16/03/21 4921 0
3694 기타서원(書院)에서 한문 배운 썰 (3): 구밀복검(口蜜腹劍) 30 기아트윈스 16/09/13 4920 5
3115 일상/생각묘한 꿈을 꾸었습니다. 11 OshiN 16/06/24 4920 5
2710 창작[조각글 23주차] 희나리. 3 헤베 16/04/29 4919 1
6143 일상/생각간밤에 꿈 이야기...(각색) 10 사나남편 17/08/22 4918 4
4549 일상/생각냉장고에 지도 그린 날 4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7/01/06 4918 11
2060 일상/생각편의점 다녀온 이야기 8 NightBAya 16/01/19 4918 0
12814 음악아마추어인 내가 피아노 콘서트를 연다면 13 카르스 22/05/14 4917 5
11821 정치윤석열 파일... (중) 23 Picard 21/06/25 4917 2
11408 꿀팁/강좌윈도우10에 있는 클립보드 사용 기능 2 소원의항구 21/02/10 4917 4
10514 정치오히려 우리는 지역주의를 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낙선할 수 없는 지역주의) 12 sisyphus 20/04/19 4917 0
9867 일상/생각소머리국밥 좋아하세요? 7 사이시옷 19/10/20 4917 12
4033 기타이산화탄소 배출증가 '덕분에' 일어난 일? 13 눈부심 16/10/29 4917 1
2463 영화이번 주 CGV 흥행 순위 4 AI홍차봇 16/03/24 4917 0
13185 기타왜 통합적 사고가 중요하고, 아는 것을 연결하는 힘이 중요할까요? 1 조기 22/09/27 4916 3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