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06/30 00:35:01
Name   김냥냥
Subject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비극 택하기 - 화양연화
영화나 소설 등을 보고 나면 꼭 무언가를 써서 기록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안 그러면 전부 다 잊혀 버리더라구요. 
영화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서 이런 글을 쓰고 올리는게 좀 부끄럽지만...^^; 그래도  여러 의견 달아주시면 저도 즐겁게 읽고 생각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스포(?)가 있을지 모르니 혹시 안 보신 분들은 주의해 주세요~!

---------------

꽃처럼 아름다운 한 때를 이르는 이 영화를, 전에도 본 적이 있다. 무척 지루해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몇 살이었을까? 나는 늦되지만, 늦된 사람이라도 영화를 두 번쯤 보면 무언가를 보게 된다. 양조위와 장만옥이 함께했던 시간은 분명 즐거운 한때였겠지만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한때이기도 했을 것이다. 치기 어린 사랑과 그 이후의 성숙이 이 영화에는 없다. 이 영화는 다 큰 어른들의 사랑 얘기다.

배경은 60년대 홍콩, 장만옥과 양조위는 어느 아파트의 옆집에 세들게 된다. 집을 구한 날도, 이삿짐이 들어온 날도 같다. 서로의 이삿짐이 서로의 집으로 잘못 들어가는 해프닝을 거쳐, 이웃으로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안면을 트게 된다. 각자의 부인과 남편 또한 마찬가지다. 장만옥의 남편은 일본으로의 출장이 잦다. 양조위는 아내와 다투고 멀어진다. 그들은 몇 가지의 상황을 통해 서로의 아내와 남편이 만나고 있는 건 아닐까 추측한다. 그리고 어느 날, 양조위는 장만옥을 불러내어 혹시 들고 있는 핸드백을 구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장만옥은 남편이 일본에서 사 온 것이라 쉽지 않겠다고 말한다. 장만옥은 양조위에게 메고 있는 넥타이를 구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양조위는 아내가 사 온 것이라고 답하는데, 장만옥은 실은 남편에게도 같은 넥타이가 있다고 말한다. 양조위도 실은 자기 아내도 당신의 것과 같은 핸드백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의 남편과 아내는 애인이 된 것이다. ("이웃 좋다는 게 뭐냐"는, 영화 초반부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대사가 퍽 우습게 느껴진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장만옥과 양조위는 소극의 주인공이 된다. 서로의 남편과 아내를 연기하는. 그러면서 점점 여러 핑계로,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게 된다.

멋진 미장센, 많은 것을 연기와 상황에 의존하고 대사를 생략해 버리는 스타일, 각자의 남편과 아내를 연기한다는 왕가위 식의 설정과 이야기(영화 막판에 장만옥이 양조위의 싱가폴 숙소에 가는 장면은 <중경삼림>과 <해피 투게더>를 떠올리게 한다) 같은 것들이 이 영화의 매력이지만, 역시 그중 최고는 인물들의 감정을 관객들이 스스로 추론하여 느끼게 한다는 점인 것 같다. 어떤 영화에서는 인물들의 감정이 인물들만의 것이다. 어떤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자신의 감정을 충실히 드러내기 위하여 애쓴다. 이 영화에서는 인물들의 감정을 관객들이 추측케 한다. 그렇기에 비록 우리의 남편이나 부인이 옆집에 사는 사람과 같이 일본으로 떠나버릴 일이 일어날 리 없다 하더라도, 그 감정은 인물들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것이 된다. 왕가위의 영화에는 감정의 공감이 아니라 감정의 경험이 있다.

영화 속에 문구가 들어가는 것은 왕가위의 스타일이다. 이 스타일은 이 영화를 당대의, 현실의 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소설 속에 있는 이야기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영화 속 이야기에 몰입함과 동시에 거리감을 만들고 그 이야기를 평하게 한다. 문구들이 없었더라면 영화는 더 매끄러워졌겠지만 보는 맛은 덜했을 것 같다.

앙코르와트 장면은 가외 같은 느낌이었고, <2046>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에서 두 인물은 결국 자신들의 사랑을 찾아 다시 만난다. 그리고 다시 거기서부터,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스스로에게 물으며 소설은 끝이 난다. <화양연화>는 그 거기서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그들은 고민 끝에 다시 헤어지는 길을 택한다. 이 영화는 어쩌면 남우세스러운 이야기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장만옥이 말하듯, "그들과 달라"야만 남우세스러운 이야기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몸을 섞거나 자신의 감정을 충실히 드러내는 순간 그들의 명분은 무너지고 그들의 사랑도 진짜 불륜이 되고 만다. 장만옥과 양조위 모두 자기 인생의 서사를 비극적이나마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이 영화의 서사를 아름답게 남기기 위한 선택을 하였다.​

삶에서는 종종 이런 일이 벌어진다. 인생의 서사를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차라리 비극을 택해야만 하는 일.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질 서사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상존하는 현실적 어려움도 힘든 것이거니와 스스로 아름답지 못한 서사를 선택한 자신을 감당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이런 생각도 해 보게 된다. 애당초 각자의 남편과 부인이 서로 만나지 않았더래도 이들은 서로를 사랑했을 것인가? 또 이런 생각도. 그들에게 선택권을 준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이 모든 것을 다 잊고 각자의 배우자가 서로의 배우자를 만나지 않는 새로운 과거로 돌아가 다시 사는 길 혹은 그냥 이대로 지나간 사랑의 흔적을 품고 사는 길. 내가 양조위거나 장만옥이라면 내 삶에 이러한 비극을 만들어 준 그 누군가를 원망하고 감사해하며, 후자를 택하겠다.



2
    이 게시판에 등록된 김냥냥님의 최근 게시물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310 일상/생각둘째를 낳았습니다. 14 고양이카페 21/11/29 5364 27
    12936 기타구멍난 클라인 병 9 Jargon 22/06/21 5364 1
    2290 기타새벽녘 밤을 밝히는 시 모음 시리즈.jpg 1 김치찌개 16/02/25 5365 0
    4660 일상/생각'조금만 더!' 를 마지막으로 외쳤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4 삼성갤육 17/01/20 5365 9
    6627 음악요즘 듣고 있는 올드 팝송들3.swf 2 김치찌개 17/11/21 5365 0
    10429 기타윈도우10 3월 업데이트 오류 발생.jpg 3 김치찌개 20/03/25 5365 1
    11740 경제무주택자의 주택구입 혜택이 개선됩니다. 7 Leeka 21/05/31 5365 0
    2570 정치구글 맵은 어느나라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8 기아트윈스 16/04/07 5366 3
    5875 일상/생각'인생을 게임하듯이 사는 법' 그리고 어른 5 삼성갤육 17/07/02 5366 10
    8166 스포츠180903 김치찌개의 오늘의 메이저리그(추신수 1타점 2루타) 김치찌개 18/09/03 5366 0
    8523 일상/생각부모님께 효도폰2대 구입완료 12 HKboY 18/11/15 5366 13
    11300 오프모임[ZOOM/모집완]새해 첫 벙 어때요? 56 나단 20/12/31 5366 4
    12488 오프모임2월 5일 토요일 4시 가락시장에서 소고기 먹읍시다. 31 소주왕승키 22/02/03 5366 6
    2069 일상/생각하노버 가는 길 (1)... 6 새의선물 16/01/20 5367 2
    2646 정치지역구 투표지는 170장, 비례대표 투표지는 177장 16 ArcanumToss 16/04/20 5367 0
    2714 방송/연예[I.O.I] 스텐바이 I.O.I 2화 3 Leeka 16/04/30 5367 0
    3305 스포츠승부조작사건이 또 벌어졌네요 43 jsclub 16/07/20 5367 1
    6194 일상/생각레고로 수학하기... 12 CONTAXS2 17/08/29 5367 0
    9366 영화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비극 택하기 - 화양연화 김냥냥 19/06/30 5367 2
    10041 게임또 한 명의 선수를 보내며... 6 kaestro 19/11/30 5367 0
    12409 정치이준석을 대하는 국민의 힘의 태도 30 파로돈탁스 22/01/06 5367 0
    12774 경제국정과제 - 부동산 관련. 21 주식못하는옴닉 22/05/03 5367 0
    9154 음악[클래식] 쇼팽 에튀드 25-2 Etude Op.25, No.2 + 벌꿀도둑,큐피드 ElectricSheep 19/05/04 5368 3
    2786 영화라이터를 켜라 (2002) _ 어느 예비군의 편지 7 리니시아 16/05/12 5369 0
    3801 게임롤드컵을 맞이하여, 팬심에 대해서 주절주절 10 OshiN 16/09/30 5369 3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