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2/07 23:22:36
Name   tannenbaum
Subject   조금 달리 생각해보기.
우스개로 오늘 타임라인에 제가 겪은 에피소드를 올렸습니다.

--------------------------------------------------------------------------------------------------------------------------------------------------------------------------

음... 아래 은머리님 일화를 보고 급 생각난 옛날 이야기

전 대학 1학년 때 지금과는 달리 참 날씬했었습니다. 46킬로 나가던 시절.... 허리도 23... 넵!! 깡마른 남자였죠. 고딩때가지 머리 빡빡 밀도 다녔던 반발심으로 머릴 길렀는데 단발정도 되었고 좀 타이트한 청바지를 많이 입었더랬죠.

하루는 도서관에서 새벽까지 공부하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려고 캠퍼스를 걸어가는데 아무도 없는 게 조용하니 좋더만요. 갑자기 어디 숨어 있었는지 왠 술처먹은 놈 하나가 튀어 나오더니 제 손목을 잡고
"아따~ 이쁘요이~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함서 얘기나 좀 할라요?" 이러더군요.

너무 어이없고 짜증이 나. 최대한 목소리 내리깔고
"아야. 이런 000이 눈깔이 장식이냐. 호로 0000가 배때지를 확 긁어서 창자를 저서블랑께. 안꺼져! 00000야"

소리를 질렀더니 기겁을 하고 꽁지 빠져라 도망가더군요. 하아.... 좀 잘생긴 사람이었으면 내가 술한잔 사려고 그랬는데...... 웬 별 그지같이 생긴 게 어따대고!!!

-------------------------------------------------------------------------------------------------------------------------------------------------------------------------

제가 게이라고는 하나 저도 어쩔 수 없는 남자인가 봅니다. 글을 올릴때만해도 '야 이 에피소드 잼나겠는걸' 하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뒤 생각해보니 위 사건이 그냥 다같이 웃어보아요 하기엔 결코 적절하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여 비슷한 일을 당해 트라우마를 가진 어느 여성분이 제 글을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생각해보니 가슴이 턱 막히더군요. 저야 그 상황에서 아무리 피지컬에서 상대한테 밀리더라도 흉기만 없다면 죽기로 덤빌수가 있었겠죠. 힘에서 밀리면 종아리를 물어 뜯던지 급소를 터뜨리던지 하다 못해 짱돌이라도 집어들어 머리를 후려칠 수도 있었을테고요. 그런데 제가 아니라 어린 아가씨가 아무도 없는 새벽 텅 빈 캠퍼스에서 술취한 남자에게 저런 일을 당했다 하면.....

저도 남자라 여자들이 생활에서 시때로 느끼는 공포심을 완전히 이해 못합니다. 완전히 이해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막말로 제가 만취해 길에 누워 있다면 기껏해야 지갑 털리는게 끝이겠죠. 하지만 여자라면.... 대한민국이 아무리 치안이 좋네. 세상이 바뀌었네 하지만 글쎄요.... 아직도 남성들에 의한 피해를 거의 일방적으로 받고 있지요. 물론 여자가 남자를 스토킹하고, 폭력을 휘두르고, 살해하는 경우도 분명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에 여자로 산다는 건 여전히 그리 녹녹하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메갈의 주장과 행동에 결코 동의하지는 않지만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공포속에서 살다 탈출구를 찾은 듯 세상에 외치는 그 감정은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안스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런 기분이요. 뭐 거창하게 말은 했습니다만 여기에 제가 이런 글을 적는다고 뭐 얼마나 달라질까 싶습니다. 저 스스로도 누군가 위험에 처한 상황을 맞닥뜨리더라도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겠죠. 그저 경찰에 신고하는 게 다일 뿐....  그렇다고 세상을 바꿉시다. 남성들이여 변화합시다. 뭐 이런건 더더욱 아니고요. 다만 사소한거라도 한 번 더 생각해보면 달리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글을 남겼습니다.

고백하자면 괜히 혼자 찔려서요. 킁.



6
  • 멋져부러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905 도서/문학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 / 서머싯 몸 6 트린 20/08/31 6063 7
9634 오프모임[불판] 태풍속 삼해소주벙 여정은 어디로 가는가? 20 naru 19/09/07 6063 5
5452 사회체포된 육군 동성애자 대위 어머니의 호소문과 장준규 개신교장로 16 tannenbaum 17/04/15 6063 6
5351 도서/문학‘회사에서 왜 나만 상처받는가’에 대한 저의 실천 방안 4 혼돈의카오스 17/04/02 6063 4
11179 의료/건강심리 부검, 자살사망자의 발자취를 따라간 5년간의 기록 4 다군 20/11/28 6062 4
10424 게임둠 이터널 리뷰 저퀴 20/03/24 6061 6
10162 역사고려장은 일제의 조작일까?(2) 1 하트필드 20/01/07 6061 2
3883 일상/생각본인사진 인증과 그에 따른 불편함 들여다보기 20 Toby 16/10/12 6061 7
9003 일상/생각자판기 커피 받아서 아메리카노 만드는 양반들 있네요 7 화이트카페모카 19/03/26 6061 0
99 기타가입, 그리고 저의 푸념.. 10 Hook간다 15/05/30 6061 2
10831 음악[팝송] 존 레전드 새 앨범 "Bigger Love" 3 김치찌개 20/07/31 6060 1
4802 일상/생각조금 달리 생각해보기. 9 tannenbaum 17/02/07 6060 6
1958 기타2016년 스타트! 장기 묘수풀이 <28> (댓글에 해답있음) 6 위솝 16/01/06 6060 0
12743 사회군대 월급 200만원에 찬성하는 이유 29 매뉴물있뉴 22/04/20 6059 3
11203 IT/컴퓨터에어팟 맥스가 공개되었습니다. 18 Leeka 20/12/08 6059 0
10457 오프모임[넷플벙/종료] 금요일 밤에는 B급 좀비영화지! 16 카야 20/04/03 6059 0
6031 일상/생각수박이는 요새 무엇을 어떻게 먹었나 -21 26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7/07/31 6059 4
12474 정치한국의 코로나 대응은 민주주의 원칙을 침해했는가 10 카르스 22/01/27 6058 14
5284 일상/생각딸기 케이크의 추억 54 열대어 17/03/24 6058 19
10782 사회[펌] 사장님 vs 직원 24 Groot 20/07/15 6057 0
3476 기타죄송합니다. 35 세인트 16/08/08 6057 7
7185 도서/문학지난 달 Yes24 도서 판매 순위 1 AI홍차봇 18/03/03 6057 1
13322 창작나의 군생활 이야기-2 (훈련소: 비만소대) 11 물냉과비냉사이 22/11/13 6056 1
12331 일상/생각회사에 확진자가 나왔습니다. 10 Picard 21/12/07 6056 2
10509 일상/생각필립라킨 "이것은 시" 4 들풀처럼 20/04/18 6056 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