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12/21 00:38:53
Name   化神
Subject   휴학하고 싶어요.
점심 먹고 있는데, 뜬금 없는 동생의 말 한마디가 순간 모두를 당황하게 했다.

아버지 생신이라고, 그동안 서로 얼굴보기 힘들었던 4인 가족이 한데 모여 나름 고급 부페를 왔는데, 한 접시 비우니 동생이 꺼낸 첫 한마디였다.

휴학하고 싶어요.


모두의 정적을 깬 건 역시나 어머니였다.

왜 휴학하려고. 휴학하고 뭐하려고.

아 공부도 잘 안되고... 워홀이나 가려고요....


내가 생각하던 그대로. 동생은 애초에 공부를 진득하게 하는 놈이 아니었다. 그건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형제는 얼굴이 닮았다는 것 외에는 닮은 것이 없다. 형은 어느새 비만이 되었고 동생은 어느새 저체중, 음악 취향도 다르고 게임 취향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하지만 형제가 공감하는 것이 있으니, 주변 눈치(특히 부모님)만 안보면 한 몸 건사할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에 목적이 불분명한 삶을 살고 있으니 공부가 될 리가 없다.

휴학하겠다고 선언한 그 상황이 이해가 되는 바이고, 나 역시 성적이 좋지 않은채로 졸업하여 대학원이라는 구실로 연명하고 있으니 딱히 동생을 탓할 처지는 못되지만,

담아두었지만 부모님한테는 곧이곧대로 들릴리가 없어 속으로만 삭히고 있는 그 많은 말들이 채 튀어나오지 못하고 속에 갇혀 있는 꼴을 보자니 한심하기 그지 없어서 또 왈칵 흥분하고 말았다.

말을 똑바로 해야지. 공부를 못해서 그냥 학교 다니면 돈 낭비하는 꼴이라 다니지 않는게 낫다고 하던가. 워킹 홀리데이 가려고 휴학하는 게 아니면서 휴학하는 핑계로 가져다 대면 누가 그래 휴학하래 라고 한다디?


한심한 그 꼴은 실상 두 형제 모두 같지만, 나 한테는 관대하고 남한테는 막대하기로는 또 누구보다 제일이라, 동생의 헛점을 날카롭게 파내었다. 아 수가 보이는 걸 어떡하란 말인가.

동생은 힘겹게 말을 꺼냈고 힘겹게 꺼낸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도 수저를 내려놓고 형국을 관망하고 있었고 어머니만 몸이 달아 동생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상황의 끝이 보이는 터라, 새로운 한 접시를 찾아왔더니


왠걸, 어머니는 동생을 다그치고 있었다.

너 그렇게 살면 사람들이 널 무시해. 애들이 아직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모르네. 그렇게 살면 누가 너 사람 취급이나 할 것 같아?

동생은 익히 나와 얘기했던, '나 혼자 살라고 치면 어떻게든 살 수 있지.' 라는 논조로 얘기를 했을것이 분명하고 이는 부모님이 듣기에 가당찮은 소리였을 것이 분명하다.

결국 동생은 패배자의 길로 한걸음씩 내딛고 있는 꼴이 되었다. 과연 현실을 모르는 건 나와 동생인걸까 아니면 부모님인걸까.

어머니의 말씀앞에 고개 숙인 내 동생은 또 묵묵부답이었다. 내 동생은 어릴때부터 그랬다. 정작 해야할 말은 못하고 속으로 쌓아두기만 하다가 나중에 꼭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나가서 모두를 당황하게 하곤 했다. 이번에도 꼭 그랬다. 물론 그 전에 내가 나서서 동생을 위한 변호를 했다.

왜 애 인생을 벌써 망했다고 그래

망하긴 뭘 망했다고 그래. 너는 꼭 그러더라. 부모가 되가지고 자식한테 조언하는 걸 왜 고깝게 들어.

이게 조언하는거야? 이게 조언이야? 애 한테 너 인생 망해. 그따위로 살면 인생 망해 라고 말하는게 조언이야?

너는 앞에 왜 그런 얘기가 나왔는 지 모르면서 뭘 그렇게 얘기해.

안들어도 뻔해. 나랑 벌써 한참 전에 끝난 얘기야. 현실 모른다고 생각하지마.


어디까지 얘기를 해야 될 지 몰라서 많이 갈등했다. 꿈은 크게 가져야지. 남들한테 베풀고 살아야지. 어머니 말씀의 핵심은 이것이었다. 사람이 당면한 상황에만 매몰되어서 살면 안된다고. 맞는 말씀이다. 그런데 반문하고 싶었다. 정작 부모님은 그렇게 사시냐고. 그런데 그럴 순 없지. 난 이미 이 사실을 15년도 전에 깨달았다.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부모님에게 적용시킬 순 없다고. 내가 어릴 적에 어머니께서 날 공부 안한다고 다그치길래 그럼 아버지는 그만큼 돈 벌어오냐고 했다가 싸가지 없는 놈, 근본 없는 놈. 집을 나가라 등등 그런 험악한 상황을 연출한 적이 있다. 그 이후로 절대 그런 얘기는 안한다.

하지만 가만히 듣자니 정말 제대로 알고 하는 말씀인가 싶다. 내 주변에만 해도 몇년 동안 고시공부 하는 사람들도 있다. 취업이 안되서 취업 재수 삼수 하는 사람들도 있고. 두산인프라코어 희망퇴직(이라고 읽고 강제퇴직) 사건도 생각이 났다. 내 주변 사람들도 다 한치 앞을 못내다보고 사는데 그리고 이미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는데 어떻게 꿈은 크게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돕고 살겠는가. 지금 당장 내 한 몸 건사하는 것도 힘든데.

식탁은 순간 말들의 잔칫상이 되었다. 물론 그 잔치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아니게 된 지 오래였다.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 지 모른다. 동생이 휴학을 하게 될 지 안하게 될 지. 그렇지만 나와 내 동생과 부모님 사이의 간격은 조금 더 벌어졌다.




2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615 기타성우 강구한의 몬스터-룽게경감 5 자동더빙 16/08/31 8537 0
    1826 일상/생각휴학하고 싶어요. 12 化神 15/12/21 8535 2
    8150 경제부동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 47 감자 18/08/31 8534 4
    1379 음악Sweet Home Alabama & Southern Man 2 새의선물 15/10/30 8531 0
    2645 정치방금 100분토론 보셨나요? 54 니생각내생각b 16/04/20 8526 0
    4112 의료/건강일본 예능에 나온 살 빼는 이야기 9 빠른포기 16/11/08 8525 0
    6245 일상/생각예비군 동원훈련 갔다왔네요. 7 콩자반콩자반 17/09/07 8524 3
    6616 게임포켓몬고 하면서 본 어리둥절한 상황 7 moneyghost 17/11/19 8518 6
    6560 일상/생각생애 첫차 뽑은 이야기(기아 Niro, 2000km주행) 10 danielbard 17/11/09 8518 11
    778 기타죽을 뻔한 쉐보레 콜벳(Corvette)을 살린 사나이... 14 Neandertal 15/08/11 8517 0
    4335 정치[불판] 박근혜 탄핵 국회 표결 160 Toby 16/12/09 8516 1
    12726 기타왜 범행일이 아니라 판결일로 집행유예 처벌이 달라져요? 6 집에 가는 제로스 22/04/15 8512 26
    4448 과학/기술SEWOL X 40 하니n세이버 16/12/26 8511 0
    4015 역사경신대기근은 왜 역사 교과서에 실려있지 않은걸까요? 11 늘좋은하루 16/10/26 8509 0
    2148 꿀팁/강좌로버트 새폴스키 - 스트레스와 인간 16 눈부심 16/01/31 8509 8
    1782 일상/생각인용의 실패와 승리, 두 정치인의 경우 9 moira 15/12/15 8507 15
    3843 꿀팁/강좌구글플레이스토어에서 환급이벤트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3 피아니시모 16/10/07 8505 1
    3821 게임[LOL] 세계 최고의 선수 1~20위 공식 번역 정리 1 Leeka 16/10/04 8505 0
    1692 꿀팁/강좌홍차넷 게시글에 youtube 영상 삽입하기 + 입맛대로 재생옵션 수정하기 5 Top 15/12/03 8503 3
    1432 창작[조각글 2주차] 안녕,버스 7 레이드 15/11/02 8503 2
    10886 게임[테포마] 제가 좋아하는 카드들 6 토비 20/08/27 8496 4
    7361 사회슬라보예 지젝과 정치적 올바름 15 Eneloop 18/04/10 8495 16
    735 IT/컴퓨터네버다이 공인인증서 16 kpark 15/08/05 8495 0
    5077 과학/기술외계 행성 중 ‘지구형 행성’ AKA 골디락스 행성 구별법 8 곰곰이 17/03/04 8493 10
    4998 게임'2048' 후기 17 별비 17/02/24 8493 1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