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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11/25 01:21:58
Name   구밀복검
Subject   창조론 교과서는 허용될 수 있을까
문제의식
- 지엽적인 과학적 논의가 아니라, 현대 과학의 근간에 해당하는 이론을 부정하는 의견이 교과서에 실리는 것은 부적절하지 않을까?
- 하지만 한편으로 과학을 부정하는 사상을 주장하고 교육할 권리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 그러나 사실상 한국 사회에서든 세계적으로든 반지성주의/반과학주의를 주장하는 개신교 세력이 파시즘과 극우의 원동력이며, 이들이 교육 현장에 뿌리를 내리면서 학교를 자신들의 정치적/사상적 진지로 삼으려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들에 의한 민주주의 파괴 행위가 갈수록 범람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사상과 교육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은 순진한 관점일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보면 과학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조직화 된 정치 활동으로 지속하는 개신교도들]은 잠재적 사회 파괴범이다.
- 물론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저런 억견은 별 영향력을 가지지 않겠지만, 10만 명 중에 5명 정도만 극우화로 이끌 단초가 되더라도 사회 전체적인 관점에서는 위험하다. 2024년 한국의 계엄령과 2025년 서부지법 습격 사태를 고려해야 한다.
- 하지만 한편으로, 개신교 세력의 반과학적 종교 교육을 제재할 경우, 다른 여타의 정치적 입장, 혹은 포괄적 교설에 의거한 교육도 억압하게 될 수 있지 않을까?
- 실제로 진보적 가치를 교육하는 것을 친북/용공적 교육이라고 억압한 사례는 한국에서 무수히 많다.
- 아울러 진보주의자들은 '공산주의 역시 정치적 입장의 하나로서 학교 현장에서 동등한 관점에서 소개되고 교육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은 진화론에 반대하고 창조론을 옹호하는 개신교 교육을 제재해야 한다는 입장과 양립 가능할까?
- 또한 공교육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회적/공공적인 가치를 민주적으로 학습하고 가르치고 교환하면서 사회적 합의를 축적과 동시에 재구성하는 역동적인 상호 작용 과정이며, 이것이 국가 통제의 강화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국가와 사회는 별개다. 그런 맥락에서 진보주의자들은 자유발행제 교과서나 검정/인정 과정이 최소화 된 교과서를 옹호해 왔으며 국정 교과서를 반대해왔다. 이를 고려할 때 개신교 세력의 교과서가 반과학적이라는 이유로 철퇴를 가하자는 주장은 자유발행제 교과서나 검/인정 절차의 경직화를 불러올 여지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토론 형식으로 이 논점들을 처리해 볼까 합니다. 이 형식은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에서 차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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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 데모스, 자네가 그 교과서를 두고 기이하다고 평가한 것에 대해 나는 조금 유감을 표하고 싶군. 광주교육청이 승인한 그 교과서는 "지구가 신의 창조인지, 진화된 것인지 어느 것 하나 진위가 밝혀진 것이 없다"고 서술했지. 나는 이 문장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네. 과학은 본래 의심하는 것에서 출발하지 않나? 다윈의 진화론 역시 하나의 가설에서 시작했고, 여전히 완벽하지 않지. 그렇다면 학생들에게 이것만이 절대적 진리라고 강요하기보다, 아직 확실치 않다고 열어두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주의 교육이 아닐까? 자네가 그토록 경계하는 도그마를 피하는 길은, 역설적이게도 진화론조차 의심해 볼 권리를 주는 데 있을 텐데.

데모스: 리베르, 자네의 그 관용적인 태도가 바로 인식론적 함정일세. 자네는 지금 의견Opinion과 사실Fact을 동일한 평면 위에 놓고 저울질하려 하고 있어. 이것이 내가 말하는 인식론적 비대칭성의 문제네.

리베르: 비대칭성이라니? 민주주의는 모든 주장이 광장에서 동등하게 경쟁하는 시스템이 아닌가?

데모스: 정치의 영역에서는 그렇네. 가령 "세금을 올리는 것이 정의로운가?" 같은 규범적 질문에는 정답이 없어. 공산주의든 자유지상주의든 교과서에 싣고 토론할 수 있지. 하지만 "지구가 둥근가?" 혹은 "종이 진화하는가?"라는 기술적 질문은 합의가 아니라 증거의 영역일세.
해당 교과서가 진위가 밝혀진 것이 없다고 쓴 것은 열린 태도가 아니라 명백한 학문적 위조네. 현대 생물학에서 진화는 중력만큼이나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교과서가 유전 정보가 창조주의 지혜를 명백하게 나타낸다고 주장하며 이를 당연한 논리요 합리라고 못 박는 것은 종교적 신념을 과학적 사실인 양 위장한 것일 뿐이야. 지리학 시간에 지구가 평평할 수도 있다고 가르치는 것을 학문의 자유라고 부르지 않는 것과 같네.

리베르: 하지만 과학적 패러다임은 변하지 않나. 뉴턴 역학도 아인슈타인에 의해 수정되었지. 만약 창조론이 훗날 사실로 밝혀진다면? 나는 틀릴 권리조차 보호받아야 한다고 믿네.

데모스: 과학적 패러다임의 변화는 더 정교한 증거와 관찰을 통해 이루어지네. 하지만 이 교과서는 어떤 과학적 증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단지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과학 이론을 부정하고 있어. 이것은 과학적 회의주의가 아니라 반지성주의적 태업일세.
더 심각한 것은 범주의 오류야. 이 교과서는 DNA라는 과학적 용어를 가져와서 창조주의 지혜라는 신학적 결론을 도출하고 있네. 과학은 How를 묻고 종교는 Why를 묻는, 서로 다른 층위의 지식이야. 이 둘을 억지로 섞어 놓고 둘 다 증명 안 됐으니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마치 육상 경기 규칙으로 축구 심판을 보겠다는 것과 같아.

리베르: 그렇다면 자네는 Teach the Controversy, 즉 논쟁을 가르치라는 교육학적 원칙을 부정하는 건가? 사회적으로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그들과 진화론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다면, 학교가 그 갈등 자체를 보여주는 것은 의미가 있지 않나?

데모스: 아주 중요한 지적일세. 하지만 그건 사회/문화 시간이나 종교학 시간에 다룰 주제지, 자연과학의 진위를 다투는 맥락에서 다룰 주제가 아니야.

리베르: 무슨 차이지?

데모스: 사회적으로는 논쟁이 있을지 몰라도, 과학적으로는 논쟁이 없기 때문일세. 과학계 내에서 진화론의 지위는 압도적이야. 그런데 교과서가 마치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진화냐 창조냐가 팽팽한 대결인 것처럼 서술한다면, 그것은 학생들에게 세상에 대한 왜곡된 지도를 쥐여주는 셈이지.
생각해 보게, 리베르. 이 교과서는 다양한 종교를 탐구한다는 목표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개신교 편향적 서술로 가득 차 있고, 심지어 헌금의 중요성까지 강조하고 있네. 이것이 순수한 학문적 탐구라고 볼 수 있나? 아니면 특정 종교 교리를 주입하기 위해 공교육이라는 제도를 해킹한 것인가?

리베르: 자네 말대로 교과서의 목적이 지식 전달이 아니라 특정 교리의 전파에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팩트를 왜곡하는 방식을 취했다면 문제는 다르군. 하지만 데모스, 나는 여전히 불안하네. 우리가 과학적 진실이라는 잣대로 이 교과서를 금지한다면, 그 권한을 쥔 자들이 나중에는 정치적 진실이나 역사적 진실까지 규정하려 들지 않겠나?

데모스: 그 불안은 정당하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는 세력에게 관용을 베풀 때, 민주주의는 더 큰 위협에 직면하게 되네. 특히 계몽령을 겪은 지금같은 시기에는 더욱 그렇지.

리베르: 데모스, 자네의 논리는 비약이 심하네. 우리는 지금 고작 교과서 한 권을 이야기하고 있어. 그런데 자네는 이것을 체제 수호의 문제로 확대해석하고 있네. 특정 종교가 교과서에 자신들의 세계관을 조금 반영했다고 해서, 그것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파괴한다는 말인가? 나는 자네가 이 작은 인정 교과서 하나에 너무 거창한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네.

데모스: 리베르, 트로이 목마는 언제나 선물의 형상을 하고 성문 안으로 들어오는 법일세. 자네는 이 교과서를 단지 종교적 세계관의 반영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것을 반지성주의의 제도화라고 부르겠네.
우리가 겪고 있는 2024년의 계엄령 사태와 2025년의 서부지법 습격 사건을 떠올려 보게. 이 비극적인 폭력 사태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그것은 대화와 타협이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신념만이 절대적 선이라 믿는 맹목성이네. 그리고 그 맹목성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아. 바로 교실에서부터 길러지는 것이지.

리베르: 폭력 사태는 처벌해야 마땅해. 하지만 그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과 이 교과서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건가? 그건 너무 나간 주장이야.

데모스: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라 인식론적 토양을 제공한다는 것이 문제네. 해당 교과서를 보게. 이 책은 과학적 검증 과정을 거친 진화론을 진위가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깎아내리고, 대신 창조주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논리요 합리라고 가르치고 있어.
이것이 학생들에게 무엇을 훈련시키겠나? 증거가 없어도 믿으면 진실이 된다는 사고방식, 그리고 자신들의 경전에 부합하지 않는 과학적 사실은 거짓이라고 매도하는 태도일세. 이것이 바로 파시즘과 극우주의가 자라나는 토양이야. 팩트를 부정하는 훈련을 받은 시민은, 정치적 선동가가 선거가 조작되었다거나 계엄만이 살길이다라고 외칠 때 비판적으로 사고할 능력을 상실하게 되네.

리베르: 그렇다면 자네는 칼 포퍼가 말한 관용의 역설을 꺼내들 셈인가?

데모스: 정확하네. 포퍼는 무제한의 관용은 반드시 관용의 소멸을 가져온다고 했지. 만약 어떤 세력이 합리적 토론의 규칙 자체를 부정하고, 기만적인 방법으로 제도를 장악하려 한다면, 민주주의는 이들을 관용하지 않을 권리가 있어.
이 교과서의 승인 과정을 보게. 심의위원 6명 중 4명이 종립학교 목사였네. 이것은 명백한 그람시적 진지전이야. 그들은 자신들의 도그마를 전파하기 위해 공적 시스템을 하이재킹했어. 학교를 자신들의 정치적/사상적 요새로 만들려는 시도를 우리가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방치한다면, 결국 학교는 민주 시민이 아니라 광신도를 양성하는 공장이 될 걸세.

리베르: 하지만 데모스, 그 불관용의 기준은 누가 정하나? 자네 말대로라면, 내일 당장 정부가 사회 혼란을 야기한다는 명분으로 마르크스주의 서적이나 페미니즘 교재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하고 학교에서 몰아낼 수도 있어. 자네가 휘두르는 방어적 민주주의의 칼날이, 자네의 목을 겨누지 않으리란 보장이 어디 있나?

데모스: 그것이 바로 껄끄러운 지점이지. 그래서 우리는 이 제재의 근거를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방법론적 엄밀성에 두어야 한다는 걸세.

리베르: 방법론적 엄밀성?

데모스: 그렇네. 우리가 이 교과서를 거부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수적 개신교인이라서가 아니야. 그들이 학문적 사기를 쳤기 때문이네. 유전 정보가 창조주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진술은 신학적 고백일 수는 있어도, 교과서에 실릴 객관적 지식은 아니야.
우리가 막아야 할 것은 특정 사상이 아니라, 사실과 신념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드는 교육일세. 만약 진보 진영에서 지구는 평평하며 이는 자본주의의 음모다라는 교과서를 만들었다면, 나는 똑같이 그 책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할 걸세.

리베르: 자네는 과학적 팩트를 기준으로 삼아 정치적 검열의 위험을 피하려 하는군.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아. 개신교계는 자신들의 교육이 탄압받는다고 느낄 것이고, 이것이 또 다른 갈등의 씨앗이 되지 않겠나?

데모스: 종교의 자유는 신앙의 자유이지, 남의 자식에게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학교에서 가르칠 권리는 아니네. 광주교육청 교과서는 개신교 외의 종교는 들러리로 세우고, 헌금을 강조하는 등 사실상 선교 책자에 가깝네. 공교육이 이런 트로이 목마를 허용한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서부지법 습격 사태보다 더 끔찍한, 이성의 붕괴를 목격하게 될 걸세.
민주주의는 단순히 모든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소리가 거짓인지를 가려내는 시스템이기도 해야 하네.

리베르: 데모스, 자네의 논리는 제법 그럴싸하지만, 나는 자네의 진영이 가진 고질적인 이중잣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네. 자네들, 그러니까 자칭 진보주의자들은 지난 수십 년간 학교 현장에서 사상의 자유를 부르짖었지.
과거 일부 교사들이 교실에서 반미 성향을 드러내거나, 자본주의의 폐해를 강조하고 심지어 친북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통일 교육을 했을 때, 자네들은 뭐라고 변호했나? "학생들에게는 다양한 정치적 관점을 접할 권리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개신교 세계관에 대해서만 그토록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가? 마르크스가 쓴 '자본론'을 가르치는 것은 비판적 사회 인식이고, 목사가 쓴 '현대사회와 종교'를 가르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인가?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이중잣대가 아닌가?

데모스: 리베르, 자네의 공격은 매우 날카롭지만, 동시에 범주의 혼동이라는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네. 자네는 지금 정치적 다원주의와 인식론적 다원주의를 섞어서 생각하고 있어.

리베르: 그게 무슨 말장난인가?

데모스: 잘 듣게. 공산주의, 자유지상주의, 페미니즘, 혹은 보수주의는 모두 가치에 관한 체계네. "사회는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 "무엇이 정의인가?"라는 질문에는 과학적인 정답이 없어. 따라서 학교는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쟁점들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설령 그것이 급진적일지라도 소개하고 토론하게 할 의무가 있네. 그것이 민주 시민 교육이야.
하지만 창조론과 진화론의 문제는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문제네. 이 교과서가 문제가 된 것은 "개신교는 사랑의 종교다"라고 주장해서가 아니라, "진화론의 진위가 밝혀진 것이 없다"라고 과학적 사실관계를 왜곡했기 때문이야.

리베르: 하지만 과학도 결국 인간이 만든 이론 아닌가? 왜 과학적 사실에만 특권을 부여하나?

데모스: 그것은 특권이 아니라 합의된 검증 시스템일세. 만약 역사 교사가 "홀로코스트는 없었다"고 가르친다면, 자네는 그것을 다양한 관점이라고 옹호하겠나?

리베르: 홀로코스트 부정은 명백한 역사 왜곡이니 곤란하겠지.

데모스: 마찬가지로 창조론을 과학 교과 과정, 혹은 그에 준하는 교양 과목에 끌어들여 유전 정보는 창조주의 지혜를 나타낸다고 서술하는 것은, 홀로코스트 부정론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사실에 대한 부정일세.
진보 진영이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옹호했던 것은 그것이 해석의 영역에 속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 교과서는 해석이 아니라 거짓 정보를 유포하고 있어. 민주주의는 의견의 다양성을 보장해야 하지만, 거짓을 사실과 동등하게 대우할 의무는 없네. 이것이 바로 기계적 중립성이 파놓은 함정, 즉 중립성의 함정일세.

리베르: 기계적 중립성이라?

데모스: 그렇네. 언론이나 교육이 "진화론도 보여주고 창조론도 보여주자"라고 말할 때, 대중은 두 이론이 마치 50 vs 50의 신뢰도를 가진 경쟁 관계라고 착각하게 되네. 하지만 실제 학계에서의 비율은 99.9 대 0.1도 되지 않아. 교과서가 이 압도적인 비대칭을 숨기고 "어느 것 하나 진위가 밝혀진 것이 없다"고 서술하는 순간, 그것은 중립을 지킨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거짓말쟁이의 손을 들어준 셈이 되는 거야.
더구나 이 교과서의 내용을 좀 더 들여다보게. 단순히 창조론만 주장하는 게 아니야. "나는 당신들의 돈지갑이 회개하지 않는 한 당신들의 회심을 믿을 수 없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헌금을 강조하고 있네. 이것이 사상의 자유인가? 아니면 학교라는 공적 공간을 이용한 종교적 판촉 행위인가?

리베르: 헌금을 강요하는 뉘앙스라면 확실히 교육적으로 부적절하군. 하지만 데모스, 자네의 논리대로라면 결국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누군가는 판정해야 하네. 지금은 자네가 과학적 합의를 근거로 들었지만, 만약 국가가 그 판정관의 지위를 독점하게 되면 어떻게 되나?
계몽령 사태를 보게. 당시 국가는 자신들의 통치 행위에 반대하는 것을 가짜 뉴스로 규정하고 탄압하려 했어. 자네가 창조론을 막기 위해 쥐여준 팩트 체크의 권한이, 나중에는 진보적인 역사 교과서를 국가관을 저해하는 거짓 선동이라고 낙인찍는 무기로 돌아오지 않겠나? 자네의 주장을 한꺼풀 벗겨보면 결국 드러나는 것은 바로 국가일세. 홉스가 말한 그 리바이어던 말이야. 나는 사이비 과학보다, 진리를 독점하려는 국가 권력인 리바이어던이 훨씬 더 두렵네.
자네는 지금 반지성주의를 막기 위해 심의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지. 하지만 기억해 보게. 불과 10년 전,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국정 역사 교과서 사태를. 당시 진보 진영은 국가가 역사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며 자유발행제와 검/인정 제도의 완화를 목놓아 외치지 않았나?
그런데 이제 와서 개신교계의 교과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엄격한 심사와 제재를 요구하다니. 이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텐가? 자네가 쥐여준 그 강화된 심의 권한을 쥔 교육감이, 내일 당장 민주화 운동 서술을 축소하라고 지시한다면 자네는 순순히 따를 텐가?

데모스: 리베르, 자네는 행정 권력의 검열과 학문 공동체의 동료 평가, 즉 Peer Review를 혼동하고 있네. 내가 요구하는 것은 교육부 장관이나 교육감이 펜을 들고 교과서를 난도질하는 것이 아니야.
이번 광주교육청 인정도서 사태의 본질을 보게. 이 교과서가 승인된 것은 국가의 통제가 느슨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행정 절차가 전문성을 잃었기 때문일세. 심의위원 6명 중 위원장을 포함한 4명이 종립학교의 목사였다는 사실이 확인됐지. 이것은 공정한 심사가 아니라, 특정 이해집단이 심의 기구를 해킹해서 자신들의 입맛대로 도장을 찍어준 것으로, 국가 기구를 사유화 한 것이야.

리베르: 그러니까 자네 말은, 심의위원을 제대로 뽑으면 해결된다는 건가? 하지만 그 제대로의 기준은 누가 정하나? 결국 인사권자인 교육감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심의위원은 언제든 물갈이될 수 있어.
진보 교육감이 들어서면 진화론자를 앉히고, 보수 교육감이 들어서면 창조론자를 앉히겠지. 그럼 교과서는 4년마다 널뛰기를 할 테고, 학교 현장은 난장판이 될 걸세. 차라리 국가가 손을 떼고 완전 자유발행제로 가서, 시장, 학부모, 학생들의 선택에 맡기는 게 낫지 않은가?

데모스: 교육을 시장 논리에 맡기자는 자네의 주장은 매혹적이지만, 치명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네. 만약 제약회사가 약의 효능에 대해 논란이 있다며 가짜 약을 팔도록 허용하고, 소비자가 알아서 판단하라고 한다면 그것을 자유라고 부를 수 있나? 그것은 방임에 의한 살인일세.
교과서는 지식의 표준을 제시하는 도구야. 나는 국가가 아니라 학문 공동체가 그 표준의 수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네.

리베르: 학문 공동체?

데모스: 그렇네. 진화론이 교과서에 실려야 하는 이유는 교육부 장관이 허락해서가 아니라, 전 세계 생물학회의 99%가 교차 검증한 사실이기 때문이야. 반면 창조론이 배제되어야 하는 이유는 진보 교육감이 싫어해서가 아니라, 학계에서 과학 이론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지.
해당 교과서가 진화론의 진위가 밝혀진 것이 없다고 쓴 것은,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학문적 기준에서 볼 때 오답이야. 이것을 걸러내는 것은 검열이 아니라 품질 관리일세.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델은 관료가 지배하는 리바이어던도 아니고, 돈과 선동이 지배하는 무제한적 시장도 아니야. 바로 의사 면허를 의사 협회의 기준에 따라 발급하듯, 교육 내용의 진위를 해당 분야의 전문가 집단에게 맡기는 전문적 자율성의 확립일세.

리베르: 전문가주의라, 하지만 전문가들 역시 집단사고에 빠지거나 부패할 수 있지 않나? 우리는 소위 엘리트들이 권력이나 이해관계에 굴종하는 모습을 숱하게 보지 않았나.

데모스: 물론일세. 전문가도 타락할 수 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문가도 믿을 수 없으니, 비전문가인 목사들이 쓴 과학 교과서를 허용하자"는 결론으로 뛰어넘어가선 안 되네.
오히려 이번 사태는 우리에게 심의 과정의 투명성을 요구하고 있어. 광주교육청은 밀실에서 목사 4명을 심의위원으로 위촉했지. 만약 이 명단과 심의 회의록이 사전에 공개되어 학계의 검증을 받았다면, 이런 엉터리 교과서가 통과될 수 있었겠나?
국가의 역할은 진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학문적 검증 절차가 공정하게 작동하도록 플랫폼을 관리하는 것에 그쳐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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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 인정 도서 심의 과정에서 특정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인사들이 과반을 차지하게 된 구조가 제일 문제. 제도를 해킹하는 것도 진짜 타짜다 싶게 정교해야 감탄하지 이건 매우 조잡한 방식인데도 통용되었다는 점에서 심의위원 선정에 있어 절차 미비가 심각하다고 할 수 있음
- 종교 교육은 할 수 있음. 하지만 '현대 사회와 종교'라는 과목명을 달았다면 비교 종교학 차원의 객관적 탐구가 되었어야 함. 타이틀은 저렇게 걸어놓고 실제로는 개신교 교육을 한 것은 이준석 식 양두구육이고 시스템 해킹을 하기 위한 술책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음. '의식화 교육'이라고 타이틀 걸어놓고 주체 사상 가르친 것보다 더 질이 나쁨.
- 실제로 어느 정도 파급 효과가 있든지 교육 현장에서 '사회적으로 합의된 전문적 사실의 체계'를 부정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불가함. 설혹 그게 인식론적 관점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그러함. 핵심은 '전문적 사실로서 합의된 사회적 체계'라는 것임. 이 체계를 부정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엄격하고 철저하고 체계적인 절차를 거쳐야 함. 그걸 그냥 '종교'라는 이유로 패싱하려고 하는 것은 인지적 사보타주고 반사회적 테러에 가까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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