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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6/14 13:30:23
Name   meson
Subject   장르소설은 문학인가? - 문학성에 대한 소고
예전에 쓴 글을 주워담는 차원에서 적은 글입니다.

일찍이 1999년에, 이영도는 문학평론가 정과리와의 대담에서 “판타지가 문학입니까”라는 공통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에도 이미 상투적이라고 느껴졌던 그 질문에 이영도는 이렇게 대답한다. “문학이 뭔지를 말해 준다면, 나도 판타지 소설이 문학인지를 답변하겠습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9/08/31/1999083170317.html)

거두절미하고 핵심을 찌르는 말이다. 그러나 『드래곤 라자』가 문단을 당혹시켰던 그때부터 웹소설이 출판시장을 장악한 현재까지, 이 역질문은 제대로 답변된 적이 없다. 문학이 무엇인지를 안전하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론도, 학계도, 심지어 교과서도 그런 규정을 함부로 해내지는 못했다. 이론마다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분류를 시도해 왔을 뿐이다. 그렇기에 판타지가 문학이냐는 질문은 무의미하거나, 혹은 문학관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이영도가 질문의 의미를 되물은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물론 25년 전이든 지금이든, 장르소설에 문학으로서의 성원권(Membership)이 있는지를 논할 때 상정되는 ‘문학’은 십중팔구는 분류로서의 집합이 아니라 ‘문학성이 있는 작품군’을 지칭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렇게 본다면 논의의 초점은 조금 더 명확해진다. 문학성의 평가는 어쨌든 제도권의 인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판타지가 문학이냐’라는 물음은 곧 [ ‘판타지에 문단문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문학성이 있느냐’ ]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문학성이 ‘있느냐’는 문언은 당연히 ‘문단문학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보았을 때 문학성이 충분하냐’는 의미이다.

바로 이 견지에서, 1999년의 정과리는 “한국 판타지는 '문학성'을 말할 단계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라고 단언했다. 이영도가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보도되지 않았다. 그가 쉬이 동의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위 기사가 정과리의 단언으로 끝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장르소설에 대한 제도권의 시선은 차가웠다. 게다가 『드래곤 라자』가 돌풍을 일으키던 시절이 지나간 뒤에는 부정적인 관심조차 사라져 버렸다. 그렇기에 판타지로 대표되는 한국 장르소설에 문학성이 부족하다는 인식은 현재까지도 ‘거의’ 수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문단의 태도가 방기에 가까웠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한국 장르소설은 왜 문학성이 부족하다고, 그래서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겨졌을까? 사실 이 질문도 - 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 제대로 답변된 적은 없다. 이 사안을 정면으로 다룬 논의는 현서(푸른꽃)라는 동호인이 2007년에 발표한 「한국 판타지의 긍정적 미래를 위하여」(https://mirrorzine.kr/forum/82623) 정도가 거의 유일한데, 그마저도 반론 1건(https://cafe.daum.net/zoozak/2Az7/13431)을 낳았을 뿐 널리 회자되지는 못했다.

상황이 이러한 이유를 말하기는 쉽다. 문단은 전통적으로 대중소설에 큰 관심이 없고(태생적으로 대중문학이라기보다는 독립문학이었던 한국 SF가 오늘날 문단에 수용된 것에는 이 점이 주효했을 것이다), 팬덤은 장르소설을 진지하게 탐구할 때조차 대개 장르적으로만 비평하며, 학계는 장르소설의 문학성보다는 그 문화적 양태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팬덤은 문화적으로 게토화되어 있고, 학계는 그 게토의 문화를 반영한 창작물로서 장르소설을 바라보고 있다. 팬덤이나 학계에서는 장르소설의 문학성을 비평 및 논의할 유인이 약했던 것이다.

따라서 장르소설이 왜 문학성이 부족하다고 여겨졌는지를 해명하는 작업은 시론적으로 수행될 수밖에 없다. 참고할 만한 기존의 논의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짚고 넘어갈 만한 것은 앞서 언급한 「한국 판타지의 긍정적 미래를 위하여」정도인데, 해당 글은 토도로프(T. Todorov)·톨킨(J. R. R. Tolkien)·루카치(G. Lukacs) 등을 화려하게 인용하며 ‘환상소설’의 효용과 기능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그러나 환상소설 고유의 문학성을 탐구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문단문학에서 말하는 문학성까지 폭넓게 다루지는 않았기에 이것만으로는 아직 불충분하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소위 문학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기준은 당연히 문학관마다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기준들이 모두 공유하는 요소를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 ‘독자가 특정한 정서적 상태를 체험하도록 만드는 것’ ]을 문학의 미덕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 정서적 상태라는 것은 이해, 공감, 새로운 감정의 경험, 인식의 전환과 같은 수많은 인지적 변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상태의 체험은 대체로 학술적·정합적 논리뿐만 아니라 서사적·감정적 자극까지 수반함으로써 종합적으로 달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달리 말하여 감응이라고 하고, 외연의 확대라고도 하며, 간접 경험이라고도 한다. 예컨대 독자가 특정한 이성적·감성적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직접 느끼며, 그 배경과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때, 문학 작품은 ‘감응’에 성공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문학성은 대개 [ 감응의 성공률과 정확성, 그리고 감응 내용의 고유성과 강렬함 ] 등에 의하여 평가되기 마련이다. 문학관마다 중시하는 가치와 방향성이 다르므로 그러한 평가에서 특정 요소에 가중치가 붙을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문학성이 평가되는 기본적인 원리는 이러하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논의를 인정할 수 있다면, 문학성을 구성하는 사조들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장르소설의 문학성을 가늠하는 것은 원리상 가능하다. 장르소설 역시 ‘독자가 어떤 정서적 상태를 체험하도록’ 만든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관건은 그 정서적 상태가 얼마나 특별한지, 그리고 그 감응이 얼마나 성공적인지에 달려 있다. 장르소설의 자장 안에 존재하는 작품일지라도 이러한 관점에서 분석했을 때 유의미한 성취를 거두었다고 판단된다면, 문학성이 높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두에서 제시된 질문에 답하는 합당한 방법이다.

이 지점에서 돌아볼 때, 이영도가 『현대문학』 2019년 9월호에 『시하와 칸타의 장』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이 소설은 『드래곤 라자』나 『눈물을 마시는 새』에 비하면 분명 대중성이 덜하다. 그러나 이영도의 색채는 여전하며, 판타지 소설인 것도 변함없다. 1999년 정과리와의 대담 이후 20년 만에 이영도의 판타지가 문예지에 실리는 날이 온 것이다. SF가 아니라 판타지 작가가, 그것도 등단하지 않고 대중소설로 성공한 작가가 이처럼 뒤늦게 인지된 것은 결국 이영도 소설에 ‘문단에서 말하는 의미의’ 문학성이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굳이 스터전의 법칙(“Ninety percent of everything is crud”)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장르소설 중에 ‘문단에서 말하는 의미의’ 문학성을 담지한 작품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대중성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독자가 어떤 특별한 정서적 상태를 성공적으로 체험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문학성은 성취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무협에서는 좌백이 이영도와 유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판타지에서는 전민희가 이영도와 비견되는 작가로 흔히 거론된다. 정도의 차이는 다소 존재하지만 이 작가들의 소설 역시 문학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런 관점에서 문학적 비평의 대상으로 포착되는 장르소설을 꼽아 볼 경우, 그중 다수는 웹소설의 몫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1세대’ 장르소설군의 기풍과 성취가 일종의 정전(Canon)처럼 여겨지는 마니아층의 인식을 고려할 때 이러한 판단은 사뭇 어색할 수 있다. 그러나 웹소설 시대가 불러온 시장의 확대가 작품의 가짓수는 물론 다양성에도 기여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결과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오늘날 웹소설의 작가 풀(Pool)은 과거보다 훨씬 넓고 출간의 문턱은 훨씬 낮으며, 이것이 다채로운 시도들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웹소설 시장의 대표적인 히트작들에서 간취되는 문학성은 괄목할 정도이다. 싱숑의 『전지적 독자 시점』, 퉁구스카의 『납골당의 어린왕자』, 유진성의 『광마회귀』는 모두 각 장르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동시에 고유한 문학적 성취까지 이룬 작품들이다. 독자가 특별한 정서적 상태 - 이해, 공감, 새로운 감정의 경험, 인식의 전환 등 - 를 성공적으로 체험하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중 싱숑과 퉁구스카는 『멸망 이후의 세계』『제국사냥꾼』에서도 대중성이 덜할 뿐 문학성으로는 자신의 대표작에 밀리지 않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히트작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면 더욱 많은 작품들이 눈에 띈다. 학인생의 『메이지 슬레이어』, 파비야의 『그리스의 방랑기사』, 견마지로의 『추구만리행』, 검미성의 『21세기 반로환동전』, 감기도령의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 등은 모두 문학적으로 비평할 가치가 있는 소설들이다. 첨G의 『세상의 끝에서 클리어를 외치다』, 습생의 『무정신검마』, 시코르스키의 『심야십담』 등에서도 정도는 덜하지만 문학성을 논할 만하다. 게다가 이 목록들은 실제 확인이 가능했던 작품 중에서, 그것도 남성향 웹소설에서만 꼽아본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이미 20세기 말에 이영도가 등장했을 때부터 그러했지만, 2025년이 절반이나 지난 작금의 시점에서도 장르소설 비평은 충분히 가능하다. 학계에서 문화적으로 해석하고 팬덤에서 장르적으로 분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단의 입장에서 문학적으로 비평하는 것이 가능하다. 문학성이 두드러지는 웹소설들이 지금처럼 많았던 적이 없었고, 그들이 제공하는 정서적 체험은 장르적 관습을 매개로 전달되는 것이기에 실제로 고유한 면이 많다. [ 단지 그러한 성취를 해명하고 비평하는 작업이 너무나 희박했기에 ]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다.

한 명의 장르소설 독자로서 말하자면, 이러한 현실은 아마도 비평계의 경로의존성에서 기인했을 공산이 크다. 장르소설의 편폭이 대부분 길고, 문학성을 담지한 작품을 찾아내기가 어려우며, 기존에 쌓여 있는 비평이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그것이 문학적 평론이 불가능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비평의 시작이 어려워지는 측면은 분명히 있다. 그러니 장르문학에 대한 선호가 웬만큼 강한 비평가가 아니고서는 개척자를 자처할 유인이 없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지적은 이미 2012년부터 있었고(https://mirrorzine.kr/features/39255), 현재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장르소설의 문학성이 의심받는 것은 이를 밝히려는 사람이 없었던 탓이지 문학성이 없어서는 아니다. 비평가의 문제 때문이지 작가의 문제 때문은 아니다. 비평가들이 이를 ‘문제’로 여길지는 물론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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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춫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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