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2/10/12 10:00:45
Name   SCV
Subject   "모든 이들을 위한 모든 이들의 삶" - 일의 기쁨과 슬픔 by 알랭 드 보통
당신은 오늘도 출근을 합니다. 어제와도 같은 일, 그제와도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몸 단장을 하고, 옷을 차려 입고 오늘 해야 할 일들을 머리 속에 그리며, 혹은 너무 피곤한 텅 빈 머리와 지친 몸으로 집을 나섭니다. 걸어서, 혹은 버스를 타거나, 지하철을 타거나, 직접 운전을 해서 일터로 갑니다. 그리고 역시 어제와, 그제와 같은 일을 하고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합니다.

이는 우리 모두의 일상이기도 합니다. 출근을 하며, 일을 하며, 퇴근을 하며 우리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은 또한 나와 마주칩니다. 우리는 그렇게 모든 일하는 사람들과 마주치면서도 그들의 삶을 잘 알지 못합니다. 또 다른 모습의 우리들이 우리를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먹는 것, 우리가 입는 것, 우리가 누리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는 누군가의 노동에 의한 것이고 그 노동을 하는 사람들 또한 다른 누군가의 노동에 기대어 삽니다. 자연계가 물질 순환, 에너지 순환, 먹이사슬에 기대어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여 스스로 그러하듯이, 우리 사람들 역시 누군가 만든 것을 누군가가 소비하며, 누군가 서비스 하는 것을 다른 누군가가 누리는, 복잡한 사회를 이루며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다른 우리를 잘 알지 못합니다. 저 역시 몇 년 째 사용하는 아이패드의 생산공장에서 일하는, 부품 하나 하나 마다 새겨진 노동자의 이름을 알지 못하고, 제가 마시고 있는 생수의 생산자를 알지 못하고, 제가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의 모든 스탭들을 알지 못하며 제가 방금 다 읽은 책의 종이를 만든 사람, 잉크를 만든 사람, 인쇄기를 돌린 사람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여전히 우리입니다. 우리가 우리로서 우리를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우리를 늘 만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흔적을 느끼며, 우리가 남긴 흔적을 매 순간 순간마다 느끼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작가는 쉽게 지나치곤 하는, 많은 다른 일을 하는 우리의 모습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그들의 삶과 일에 녹아들려고 노력하며 세세하게, 생생하게 글로 그림을 그립니다. 흐릿한 흑백 사진 안에서 느껴지는 고단한 만큼이나, 글을 쓰는 내내 그의 필체 역시 고단합니다. 글을 쓰는 것을 노동이라, 일이라 부르기는 좀 어색하지만 그가 한 일 역시 우리에게 이렇게 흔적을 남깁니다. 우리 마음 안에 흔적을 남깁니다.

그래서 일은 기쁘고 또 슬픈 것이 아닌가 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삶을 지탱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모든 이들이 각자 모든 것에 대해서 알지 않아도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넓고도 복잡한 세상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은 분명히 기쁜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일의 보람도 이 기쁨의 한 종류일 수 있겠고 우리가 다른 이들의 흔적을 누리는 것 또한 하나의 기쁨 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은 슬픈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 기대어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을 때 까지 모든 우리에 대해서, 모든 우리가 하는 일들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것, 모든 이를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나와 나의 일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역시 일의 고단함이나 서글픔에서 오는 슬픔과도 같은 슬픔이라고 생각합니다.



7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2503 사회지하철에서 게임하다 고소당하면 겪는 일 13 주식하는 제로스 22/02/09 6534 7
    12542 기타봄에 뭐 입지 (1) 바시티 재킷 18 Ye 22/02/24 6896 7
    12551 정치우크라이나 교수:우리가 죽기 전에 우리를 묻지마세요 1 syzygii 22/02/26 5321 7
    12576 방송/연예청평악, 정치개혁과 인간군상. 4 코리몬테아스 22/03/04 5602 7
    12694 게임그냥 써 본 2022년 LCK 스프링 시즌 결산 (하) 3 The xian 22/04/03 5114 7
    12700 음악학원 느와르 2 바나나코우 22/04/06 3921 7
    12704 사회[뇌내망상]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될 것이다 4 주식못하는옴닉 22/04/08 5815 7
    12744 일상/생각요즘은 남자들도 육아휴직 쓴다던데.. 8 Picard 22/04/20 5386 7
    12849 오프모임이번주 일요일에 홍터뷰를 하는데... 47 서당개 22/05/23 5900 7
    12854 여행캘리포니아 2022 - 4. 나는 태평양 해안 도로에서 살아남았다 아침커피 22/05/24 5110 7
    12929 IT/컴퓨터휴직된 구글 직원과 인공지능의 대화 전문 7 Jargon 22/06/18 6121 7
    12990 음악인천에서 바람이 분당 4 바나나코우 22/07/11 4068 7
    12992 오프모임7월 16일 토요일 오후 두 시 노래방 모임 오세요~ 10 트린 22/07/12 4397 7
    13005 의료/건강러너스 클럽 발 분석과 아식스 젤카야노29 프리뷰 22 서당개 22/07/18 7203 7
    13014 여행아나돌루 카바이, 이스탄불, 튀르키예 4 간로 22/07/22 4723 7
    13013 정치더 보이즈. 양비론에 대해 답하다. '이 쇼는 많은 면을 가졌지만, 모호하진 않습니다.' 10 코리몬테아스 22/07/21 5367 7
    13019 사회“당구 재미없어 억지로 배워…성공해 고국 아이들 도우려 독하게 친다” 10 구밀복검 22/07/24 7050 7
    13091 의료/건강국민건강보험공단 일반건강검진이란? 4 괄도네넴띤 22/08/17 6298 7
    13221 도서/문학"모든 이들을 위한 모든 이들의 삶" - 일의 기쁨과 슬픔 by 알랭 드 보통 1 SCV 22/10/12 3835 7
    13304 댓글잠금 정치풍산개 논란에 관한 당사자의 이야기 18 뉴스테드 22/11/09 4998 7
    13308 사회한국 사회의 검열이 완화되지 않는 진짜 이유? 80 카르스 22/11/10 6426 7
    13422 일상/생각장모님께서 회수를 거부하시네요. ㅋㅋㅋ 8 큐리스 22/12/23 5256 7
    13501 기타끌올) 홍차상자가 4일 남았습니다. (with 설빔) 11 tannenbaum 23/01/23 3724 7
    13583 사회서구와 동아시아에서 추구하는 자유는 다르다 13 카르스 23/02/21 3679 7
    13668 문화/예술천사소녀 네티 - 샐리 아버지의 타로점은 맞았을까? 4 서포트벡터 23/03/25 4130 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