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23 16:15:55수정됨
Name   이그나티우스
Subject   2030세대는 공정에 민감하다?
(저 자신이 2030세대의 대변자가 될 수도 없고,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그 세대의 1명인 제가 느낀바를 적어 본다면,)

2030세대가 생각하는 '공정'이라고 하는 것은 후생경제학적, 윤리학적 의미에서의 평등이라기보다는 '예측가능성'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을 가고, 대학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내면 승진하고 월급이 오르고...

물론 젊은 사람들도 인생에 불확정적 요소가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중간에 사고를 당하거나 병에 걸릴 수도 있는 것이고, 인간관계나 가족문제로 인생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것쯤은 다들 알고 있는데, 문제는 그런 불확정성을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요즘의 사회 분위기 자체가 젊은이들이 인생계획은 커녕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살벌하게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열심히 공부해도 좋은 대학에 못 갈 수 있고,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해도 실업자가 될 수 있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해도 알바나 계약직으로 떠돌다가 다시 산업재해를 당하거나 백수가 될 수 있고... 그리고 이런 안좋게 풀릴 확률이 좋게 풀릴 확률보다 훨씬 높아지다보니 불안감과 좌절감이 높아집니다.

이걸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각종 공무원 시험과 자격시험입니다. 주로 이 바닥에는 학창시절에 공부에서 두각을 드러낸(그렇지만 부모가 취직까지 보장해줄 만한 빽은 없는) 친구들이 많이 들어오는데, 요즘 우리나라의 시험이라는 것들이 대개 떨어뜨리기 위한 것들이어서 극소수의 성공사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다 실패자로 끝나고 맙니다.

시험에서 떨어지고 나면 몇년동안 공부는 열심히 했는데, 나이만 먹고 이렇다할 경력이나 기술도 없는 말 그대로 인간 폐품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그건 다 니책임이지."라는 주위사람들과 사회의 따가운 시선은 덤이고요.

우리나라에서 성실과 노력만큼 후려치기를 당하는 가치가 또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학생들은 그저 열심히 노력했을 뿐인데, 바늘구멍과 같은 문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예 아무것도 안하고 놀기만 한 것만도 못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극소수의 성공 케이스를 빼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결말은 공무원시험뿐이 아니라, 2030세대가 공동체로 편입되는 과정 곳곳에서 이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진학, 취업, 연애, 결혼, 노후대비, 내집마련, 사회생활 등등. (아 연애와 결혼은 어차피 못하는거라 아닌가?)

예측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개인의 차원에서 본다면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잘되면 어떻게든 입에 풀칠이야 하겠지만, 잘 안되면 사회 낙오자가 된다는 공포감에 짧게는 몇달, 길게는 몇년씩 시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젊은이들이 예측 가능성을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이들이 경쟁의 신화에 잡아먹힌 괴물들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두 다리 뻗고 잠 좀 자게 해달라고 하는 지극히 속물적인 삶의 요구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런 저의 의견에 제기될 비판에는 익숙합니다.
-인생은 원래 그런것이다. 우리도 먹고살기 힘드니, 니들만 힘든것처럼 찡찡대지 말아라.
-IMF시절에는 훨씬 더 힘들었다. 나대지마라.
-학창시절에 공부 좀 한 것 가지고 유세부리지 마라. 인생은 실전이다.
-원래 세상은 냉정한 것이다. 직장은 니들 응석을 받아주는 유모가 아니란 말이다.
-주제에 맞게 눈을 낮춰야지, 책상에서 펜대만 굴리려고 하니 쯧쯧
-꼬우면 니들도 짱돌을 들어서 투쟁해라.
-경쟁만능주의에 잡아먹힌 괴물들. 사회에 대한 고민이라고는 없는..
-어이 김씨 거 밥먹는데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그거 하던 공부나 열심히 하세요.
등등

물론 위 비판에 제가 일일이 반박할 생각은 없습니다. 사회에서 이미 자리를 잡고 큰일을 맡고 계시는 어르신들이 하시는 말씀들이라 다 일리가 있는 말씀일 것이고, 거기에 제 힘으로 돈 한번 벌어본 적 없는 제가 뭐라고 따로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말씀드리고픈 것은 젊은 사람들이 경쟁의 욕망에 영혼을 빼앗긴 악마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입장과 생각을 가진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7
  • 같은생각입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7078 영화클로버필드 패러독스를 보고 3 저퀴 18/02/10 7167 0
2420 육아/가정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고 싶다 29 Toby 16/03/17 7167 1
607 기타(수정) 덕후송 '당신은 그 안에'란 음악 기억하시나요? 3 모여라 맛동산 15/07/17 7165 0
5483 정치문재인, 안철수의 지난 7일간 구글 트렌드 분석. 13 Bergy10 17/04/20 7164 1
4009 기타[스포] 작가도 수습하기 힘들 때 6 피아니시모 16/10/25 7164 0
11655 경제NFT, 제 2의 루나 엠버시인가? 7 lonely INTJ 21/05/08 7161 6
1793 의료/건강Happy Holidays를 보내는 의사들에게 15 Beer Inside 15/12/16 7161 0
6911 스포츠잉글랜드 축구는 왜 자꾸 뻥뻥 차댈까요. 35 기아트윈스 18/01/07 7159 10
12612 댓글잠금 정치이번 선거에서 부동산 지분은 어느정도나 될까? 58 Leeka 22/03/11 7158 0
9719 여행부산 식도락 여행 후기(주의:음식사진다수) 7 야근하는밤비 19/09/27 7158 8
1874 정치정치를 알지 못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 최재천의원의 경우 36 Beer Inside 15/12/27 7158 0
2185 방송/연예미드추천- Fargo(메타크리틱 2015 베스트 TV쇼) 2 쵱녀성 16/02/07 7156 1
10915 게임[테포마] 카드평가 - 사건형 카드 10 토비 20/09/02 7155 3
11266 일상/생각2030세대는 공정에 민감하다? 54 이그나티우스 20/12/23 7154 7
4962 경제일본 예능에 나온 쇼핑하는 이야기 3 빠른포기 17/02/22 7154 3
1910 일상/생각(뻘글주의)새해 첫 글은 제가..! 10 얼그레이 16/01/01 7153 0
8049 꿀팁/강좌구글독스 OCR(문자판독)기능 사용하기 4 Toby 18/08/13 7152 9
650 기타불금에 장기 묘수풀이 한수..(해답없는 문제) 29 위솝 15/07/24 7152 0
11742 도서/문학표인. 왜 이렇게 읽을수록 창천항로 생각이 나지? 3 마카오톡 21/06/01 7151 0
10344 철학/종교"증거장막"이란 단어의 본래 의미 5 소원의항구 20/03/04 7151 7
2593 방송/연예 Insult Comedy 20 Beer Inside 16/04/11 7150 0
623 생활체육전창진 감독 구속영장 방침 9 솔지은 15/07/21 7150 0
10601 정치n번방 방지법 16 루이보스차넷 20/05/20 7148 0
960 IT/컴퓨터다음팟 대격변 11 세계구조 15/09/09 7148 0
10132 영화씨네21 선정 2019 올해의 영화 2 손금불산입 19/12/31 7147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