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05/02 19:32:57
Name   Schweigen
Subject   큰고모님
큰고모님이 계십니다. 40년대 생 어느집이나 그랬 듯 기집년이 무슨 공부냐 기집년이 먹물 들면 베린다 소리 듣고 자라셨죠.

찢어지게 가난한 형제 많은 소작농 장녀로 태어난 죄로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면 예닐곱살 부터 물긷고 빨래를 했답니다. 열살이 되기전에는 동생들 등에 업고 아궁이 불때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기 시작 했구요.

그러다 겨우... 국민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그것도 열한살에....

고모님은 학교가 너무 좋으셨대요. 책도 좋고 선생님도 좋고 무엇보다 공부가 그리도 좋으셨대요. 동네에서 천재소리 듣던 아버지 못지 않게 영민하다는 선생님의 칭찬을 지금도 명절이면 행복하게 미소 지으며 이야기 하시곤 하셨죠.

5학년을 마쳐가던 어느날이었어요. 글쓰고 셈 할 줄 알면 기집은 더 배울 필요 없다. 그만하면 되었으니 너도 이제 일을 하라며 광주 일신방직에 말을 넣어 놨으니 가서 일하라 하셨답니다. 명목상 일하라는 것이었고 실제론 00이(우리 아버지) 고등학교 가야하니 가서 돈 벌어 오라는 것이었죠.

큰고모님은 다 아시면서도 한마디 대꾸도 없이 찬바람 불던 겨울 보자기에 허름한 옷가지를 챙겨 광주로 가는 버스에 오르셨대요. 그리고... 태어나 한번도 부모님 탓, 동생들 원망한 적 없으셨던 분이 그날은 무척이나 미워 한 없이 눈물이 나셨대요. 후로 공장에서 먼지 먹어가며 일하다 길에서 중학교 교복 입은 여학생들만 보면 그리도 부러웠답니다.

열여섯 그 작고 어린 소녀는 아버지가 대학을 마칠때까지 공장에서 일을 하며 월급 대부분을 집으로 보내곤 정작 자신은 변변한 옷한벌 못 사입고 아끼고 아껴 겨우... 광주 시내에 전세방을 얻으셨어요. 이제부터 뭐라도 시작해 볼 요량이셨대요.

그러나 어쩌나요...

어느날 어디어디 아무개 둘째아들놈과 혼처 잡아 놨으니 시집가라 하셨대요.  여자가 스물이 넘으면 시집을 가야한다고요. 너도 혼기가 지났으니 어서 결혼하란 그말을 들은 큰고모님은 그날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수백번도 더 들으셨대요. 그러나 다행히 처음 본 고모부는 좋은 분이셨고 결국 부모님 말씀대로 결혼을 하셨어요.

그리고 50년이 흘렀어요.

지금도 식당 허드렛일, 건물 화장실 청소, 교회 잡일 하시며 돈을 버세요. 사촌들이 그만하시라고 제아무리 뜯어 말려도 고집을 못당하셔요. 손주들 옷 사입히고 용돈 주고...

제가 이런저런 이유로 친가 아버지 남자형제들과는 연을 끊고 살지만 고모님들과는 간간히 보고 삽니다. 또 가능하면 제가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갚아 드리려고 노력하는 중이구요.

조금 있으면 큰고모님 팔순이라 그냥 생각나 끄적거려 봤습니다.




26
  • 남의일같지 않아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972 일상/생각가난해야만하는 사람들 51 rustysaber 20/09/20 7675 22
11094 일상/생각강사들은 왜 잡소리를 할까? 24 rustysaber 20/10/27 5947 6
11134 경제2018년 소득 7분위가 쓰는 부동산 및 종부세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 33 rustysaber 20/11/14 6915 7
11198 도서/문학독후감-88만원세대,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었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22 rustysaber 20/12/06 6148 10
12045 일상/생각인터넷에서 뻘글과 싸움은 왜 해야만 하는가 17 rustysaber 21/09/04 4979 1
12054 정치교육부 '군필 교원 호봉 조사에 일선학교 혼란'에 대한 생각 11 rustysaber 21/09/08 5131 1
12177 도서/문학삼국지를 지금 읽으면 다르게 보이는 점 7 rustysaber 21/10/16 5880 1
1821 일상/생각두통이 옵니다. 2 RyLiA 15/12/20 5138 0
13845 도서/문학MZ세대는 없다! 14 R세제곱인생 23/05/13 4246 23
14104 오프모임[모집완료] 숙성 삼겹살 저 포함 4인팟 모집합니다. 19 R세제곱인생 23/08/15 4302 5
2087 일상/생각연구 윤리와 관련해서.. 28 S 16/01/22 4941 0
2239 요리/음식홍차넷에 티타임이니까 홍차 이야기... 19 S 16/02/16 8095 4
2337 일상/생각알랭드보통의 잘못된 사람과 결혼하는 것에 대하여 54 S 16/03/03 6359 5
9632 방송/연예한국 드라마 추천해주세요. 33 s.v.p. 19/09/07 8310 0
9696 사회공공기관 호봉제 폐지(직무급제 도입)에 대하여 7 s.v.p. 19/09/23 8546 2
9964 사회도로공사 등 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보며 드는 단상 16 s.v.p. 19/11/08 6966 1
14570 철학/종교토비와 함께한 월요일 [1편] 7 saint 24/04/01 3076 0
14738 의료/건강응급실 이용 경험 인터뷰 연구 참여자 모집하고자 합니다. 13 saint 24/06/11 3145 0
1548 정치버니 샌더스는 민주당의 후보가 될 수 있을까? 17 santacroce 15/11/13 8635 6
7949 방송/연예[장정일 칼럼] 부실한 보도에도 공적가치가 있다? 4 Sargasso 18/07/26 5377 3
10541 일상/생각큰고모님 4 Schweigen 20/05/02 5873 26
10275 오프모임종로)번개는 번갯불에 튀겨야 제맛!! 금일 13:30분 쌋뽀로 관훈점(구 어담) 40 Schweigen 20/02/09 6722 10
10317 일상/생각세무사 짜른 이야기. 17 Schweigen 20/02/23 7113 38
10490 기타이벤트) 먹이님 후원으로 당첨자 늘립니다!!! - 21대 총선 스코어 맞추기. 치킨, 스벅 받고 기부하자!! 91 Schweigen 20/04/13 5431 22
10502 기타기부이벤트 총선 스코어 맞추기 결과 발표. 21 Schweigen 20/04/16 4649 33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