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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10/19 22:21:04
Name   골든햄스
File #1   IMG_0293.jpeg (181.3 KB), Download : 51
Subject   여러 치료를 마쳐가며


EMDR을 해주는 의사선생님께 저희 커플은 꽤나 재밌는 존재가 돼서, 서로 이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저와 치료사 선생님 사이에는 다행스럽게도 라포가 형성되었는데, 그 뜻인즉슨 저희가 서로를 좋아한단 겁니다.

가끔은 저 보고 별나다고 하시기도 하고, 저희 아버지를 사랑한 것이 제가 수치스럽다고 하면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강하게 말씀해주시기도 하는 의사 선생님 덕에 많은 것들이 마음 속에서 갈무리가 되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아버지가 만든 프로그램 중 하나가 요즘 홍차넷에 언급도 되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물리학과 출신이지만 대학에 컴퓨터가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 담당 수업 조교로 천공카드 프로그래밍부터 하셨던 세대지요. 그래서 후에 공기업을 다니다 나와서 벤처사업을 하다 망한 뒤로는, 프리랜서 프로그래머로 지내셨습니다. 꽤나 많은 사람이 쓰는 사이트를 만든 적도 있고, 특유의 뜬금없는 정의감으로 한국 인터넷 역사에 참여한 적도 있으셨죠.

좌절 이후 아버지가 저에게 한 학대와 끊임없이 만들어지던 그 악의의 뭉게구름은 여전히 저를 제대로 못 자라게 한 요인으로, 가끔 제가 스스로 자괴감에 쌓여 ‘왜이리 난 마음이 약하고 이걸 모르나’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EMDR을 거치며 진정으로 묻혀놨던 상처들을 이해받고, 처리하고, 그러면서 생각난 게 아버지가 양재천에서 자전거를 가르쳐주던 기억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아버지가 아주 가끔 분노 없이 마음이 순수할 때가 있었습니다. 자연의 경이를 가르쳐주실 때 주로 그랬습니다. 나뭇잎의 이파리는 피보나치 수열을 따른단 점을 알려줄 때도 그랬고, 가끔 기분좋게 취해 간혹 안 때릴 때면 골드바흐의 추측이나 필즈상 얘기를 하시곤 했습니다. 그럴 때의 아버지는 학문을 사랑한다는 말 자체가 부차적일 정도로, 그냥 학문의 흐름 그 자체와 마음이 연결되어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꿈꾸던 학문의 세계와 멀어졌을 때의 좌절감은 어쩌면 보통내기는 상상도 하기 힘든 크기일지도 모르죠..

어쨌든 그런 순간의 배움들이 제게도 학문에 대한 사랑을 심어줬었고, 힘든 인생에서 저를 버티게 했었습니다.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고 싶단 마음에 어려운 조건에서 학업적 성취를 냈었듯, 사랑은 적어도 제게 많은 걸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었습니다.

그러다 좌절됐을 때, 엄청나게 절망했었지만, 지난 사랑의 크기만큼 상처도 깊었지만 다시 일어났습니다.

비버와 좋은 기억을 하나둘 쌓아가고, 존중하고 존중받는 경험과 즐거운 대화의 경험을 쌓을수록 제게 있던 ‘쎄한’ 기운이 가시고 인상도 밝아지고 마음 속에도 빛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옛날이면 멘탈이 한번 부숴지면 스스로 자학하며 (주로 엄마가 절 맨날 탓하던 게 내면화된듯함) 2차, 3차, .. 계속 공격이 이어지며 마음이 지하로 내려가곤 했는데 이제는 저를 지키는 또다른 ‘저’가 생겨났습니다.

옛날엔 그런 자학을 하는 게 너무 당연해서 스스로 하는 줄도 몰라서 상담에 가서도 호소를 못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이제는 마음 한편에서 “아냐! 햄스를 괴롭히지 마라! 햄스는 존재 자체로 소중하다!” 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생겼습니다. 그럼 몇 차례 자학하는 나와 날 보호하는 내가 대거리를 하면서 마음을 두고 싸움을 일으킵니다. 그럼 전만큼 기분이 최악으로 가지는 않더라고요..

특히 아이들을 온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가르치고 그만큼 사랑받던 때의 기억은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더라구요.. 그 시선으로, 아이들을 보던 눈으로 날 봐주자.. 그 생각이 특히 중요한 생각이었던 거 같습니다. 전 제가 가르친 모든 아이를 사랑했거든요.

점점 읽히지 않던 책이 다시 조금씩 읽히기 시작합니다. 결혼식을 어떻게 할지 얘기하기 시작합니다. 아직 아현동 달동네 주민이 정체성이라 화려한 결혼식을 하기가 곤란하다고 솔직히 터놓고 말했습니다. 골목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떠들썩했고 모두가 문을 열어놓다시피 하고 지내던 그 동네가 아직도 제게는 고향입니다. 그래서 소소한 결혼식을 하자고 얘기는 하는 중입니다.

아직도 많이 몸과 머리가 지쳐있고 너무 독특한 성장환경과 성격과 스펙과 모든 것이 배합되어 가끔 저 스스로도 이상한 키메라(?)처럼 느껴지고 사회생활이 버거울 때도 많습니다만 .. 문득 “다 나았다” 생각이 들기에 후기를 적어봅니다. 나자신이 되는 데 이토록 많은 고통이 있었으니 그만큼 피어난 뒤에는 결실이 있길 기대하는 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평온히 살고 싶기도 하네요..

살아있는 생명은 매순간 최선을 다한다고 말씀해주신 상담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살아보니 과연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 스스로도, 남도 용서하고 사랑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답은, 운동과 공부부터 열심히 하는 거겠지만요 (….) 삶의 모든 불가해한 여정에서 다들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치료 내내 붙들던 제 한마디는 : “구원은 다음 줄에 있다.” 이런 불편한 소재의 글을 계속 연재한 건 언젠가 누군가 비슷한 여정을 걸으며 자료를 찾아볼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분께 제 글들을 바칩니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5-11-05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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