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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4/04 22:10:27
Name   호미밭의파스꾼
Subject   계엄 선포 당일, 아들의 이야기
계엄 선포 당시 제가 가장 걱정했던 건 전방의 해병대에서 복무 중인 장남이었습니다. 나중에 휴가를 나온 녀석에게 그 순간의 부대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계엄 성명 전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당직실과, 막 취침하려다 '계엄'이란 워딩만 급하게 전파 받은 내무실 장병들 간의 격차 때문에 10여 분 간 벌어진 해프닝이긴 했습니다.

아들은 그때 간부들로부터 준비 태세 명령이 떨어졌는지, 장병들 스스로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했습니다. 아무튼 군복을 입거나 군장을 싸던 장병들은 어느 순간부터 전의를 다지는 내용의 해병대 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답니다. 한두 내무실에서 시작된 노래는 이내 건물 전체를 울리는 쩌렁쩌렁한 합창이 되었고, 그 소리를 배경으로 우는 동기나 후임을 다독이거나, 주로 가족과 나라를 위해 용감하게 죽자는 내용의 고함을 지르는 장병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더군요. 가족을 못 보고 죽게 되는 건 슬프지만, 이 사람들과 함께 의미 있게 싸울 수 있어 기쁘고 자랑스럽다고.


저는 탄핵 정국 동안 수시로, 직접 보지도 못한 그 광경과, 그 안에 있던 제 아들과, 비슷한 또래 청년들의 마음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제가 가장 혐오하고 증오하는 악은, 인간의 선의를 악용하고 속이는 종류의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입대 당시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고, 사회적으로도 희화화 된 지 오래인 해병대의 결기지만 그 안엔 분명 조금은 미숙하고 거친 형태로나마 공동체를 위하는 순수하고 고결한 희생정신이 포함되어 있었을 겁니다. 탄핵 반대 집회 측에도, 단언컨대 지도부를 제외한 참가자들 중에는 순전한 우국충정으로 그 자리에 서신 분들이 꽤 계셨을 것입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선량한 민의를 정제하고 증류하긴 커녕 변질시키고 곡해하는데 능한 현재의 민주주의의 폐단을 국민이 바로 잡았네요. 그럴듯한 결론을 내릴 능력과 식견은 없고, 긴장이 풀려서 인지 나아가던 몸살 감기가 다시 도졌지만, 평소처럼 비관하는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되려 다 잘 될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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