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4/10/30 08:55:34수정됨
Name   심해냉장고
File #1   619883_572490_566.jpg (62.3 KB), Download : 80
Subject   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어제 교황청은 2025년 희년 마스코트를 발표했습니다. 이름은 루체, 이탈리아어로 '빛' 이라 합니다. 아니메 풍 소녀 캐릭터인 덕에 잠시 화제가 되었고, 저도 그렇게 웃고 즐겼습니다. 그렇게 밤이 되었고, 웃음의 시간은 지고 미네르바의 시간이.

마스코트는 기본적으로 '순례자'를 상징하며, 개별 구성 요소들은 이러하다 합니다 : 노란 우의는 폭풍우를 피하기 위한 뱃사람의 우의입니다. 조개 껍데기 모양으로 빛나는 눈의 조개 껍데기는 인내를 상징한다 합니다. 목에 걸린 묵주는 끊임없는 기도를, 십자가는 십자가를 나타냅니다. 진흙으로 더럽혀진 장화는 고된 여행길의 기록이며, 지팡이는 끝없는 여정의 도구입니다. 아, 가슴의 희년 로고는 파도를 형상화한 모양입니다. 그렇게 파도의 끝에는 십자가로 만들어진 닻이.

그러니까, 루체는 비 내리는 진창 길을 기도와 믿음과 인내로 헤쳐나가는 자입니다. 눈에는 인내의 조개가, 가슴에는 믿음의 십자가가 기도의 묵주가, 손에는 여행의 지팡이가, 그리고 진창에 더럽혀진 장화가 비를 막아줄 우의가. 그렇게 파도를 뚫고, 사람이 파도가 되어, 십자가의 닻에 의지해 걷는 순례자.

십자가와 묵주는, 믿음과 기도는 물론 지극히 종교적인 개념일 겁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각자에게는 어떤 종류의 삶의 믿음이, 그리고 믿음으로 향하는 알알이 이어진 실천들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은 재해석의 여지 없이 우리네 삶일 겁니다. 비가 내리고, 바닥은 진창이고, 하지만 삶을 걸어가야 할 겁니다.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영원히, 인내하며. 걸어 내야죠. 나만의 십자가를 믿으며, 나만의 묵주에 기도하며, 나만의 지팡이에 몸을 의탁한 채로, 영원히, 끝날 때까지.

'그러니까 살아내라고' 하는 의지가 전해진달까요. 힘이 되는, 좋은 마스코트인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현재 천주교 신자는 아닙니다만, 모태 신앙으로 태어나기는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징들이 더 익숙하게 깊게 다가오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와는 별개로 아무튼 뭐 그렇게 살아내 봅시다. 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걸어내 봅시다. 장화가 온통 진흙으로 더렵혀진다 해도,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걸어 봅시다.

평화를 빕니다.


--

하필 마스코트가 '어린 소녀'인 지점에 대해서는, 공식의 설명은 없지만 팬덤(천주교도 무리들을 이런 단어로 언급하는 건 실례일 지도 모르겠지만, 제게는 일종의 예의입니다)의 재미있는 해석이 존재하는 듯 합니다. 마태복음 18 : 3의 이야기라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래요,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살아내 봅시다.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4-11-12 15:40)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21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445 일상/생각포스트-트라우마와 사회기능성과 흙수저-학대가정 탈출 로직 8 골든햄스 25/03/06 2227 21
    1416 철학/종교비 내리는 진창을 믿음으로 인내하며 걷는 자. 8 심해냉장고 24/10/30 2506 21
    1355 일상/생각전세보증금 분쟁부터 임차권 등기명령 해제까지 (1) 9 양라곱 24/01/15 4852 21
    1330 일상/생각아내는 아직 아이의 이가 몇 개인 지 모른다 2 하마소 23/09/25 3934 21
    1188 정치/사회현대 청년들에게 연애와 섹스가 어렵고 혼란스러운 결정적인 이유 63 카르스 22/04/19 8240 21
    1187 꿀팁/강좌꼬맹이를 위한 마인크래프트 서버 만들어주기 17 덜커덩 22/04/19 10488 21
    1159 경제OECD 경제전망 - 한국 (전문번역) 8 소요 22/01/06 6004 21
    1106 기타소우주를 여행하는 아미를 위한 안내서 : 1 22 순수한글닉 21/07/16 5661 21
    1041 영화홍콩의 화양연화[香港的 花樣年華](1) 4 간로 20/12/18 6698 21
    1032 일상/생각이어령 선생님과의 대화 7 아침커피 20/11/19 6594 21
    1017 체육/스포츠르브론 제임스의 우승은 그를 역대 2위 그 이상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가? 15 손금불산입 20/10/14 6810 21
    1012 문학토마 피케티 - 자본과 이데올로기 리뷰(아이티 혁명을 중심으로) 9 에피타 20/10/03 6545 21
    894 의료/건강꽃보다 의사, 존스홉킨스의 F4(Founding Four Physicians) 11 OSDRYD 19/12/06 6553 21
    831 의료/건강문득 생각난 파스 고르는 팁 20 켈로그김 19/07/11 8238 21
    741 정치/사회세계1% 연구자 논란 22 제로스 18/12/06 9186 21
    661 의료/건강고혈압약의 사태 추이와 성분명 처방의 미래 28 Zel 18/07/10 7946 21
    642 의료/건강애착을 부탁해 11 호라타래 18/06/03 8101 21
    628 일상/생각입학사정관했던 썰.txt 17 풍운재기 18/05/08 8300 21
    619 정치/사회범죄의 세계 - 임대차보증금 대출사기 17 烏鳳 18/04/20 7610 21
    600 일상/생각다들 좀 더 즐거웠으면 좋겠다. 9 판다뫙난 18/03/05 6469 21
    596 철학/종교옛날 즁궈런의 도덕관 하나 6 기아트윈스 18/02/23 7829 21
    663 여행어두운 현대사와 화려한 자연경관 - 크로아티아 12 호타루 18/07/15 7136 21
    578 일상/생각이불킥하게 만드는 이야기. 28 HanaBi 18/01/16 6984 21
    562 게임그래도 게임은 한다. 25 세인트 17/12/14 9696 21
    517 여행안나푸르나 기슭에 가본 이야기 (주의-사진많음) 6 aqua 17/09/23 8000 21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